그림이야기

서양미술사

덕유파스텔 2008. 8. 24. 13:47

 


*원시미술 - 신비에 싸인 기원

위의 제목의 원시(Primitive)라는 용어는 '미개인' 또는 그들이 우리보다 단순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거쳐온 문명 이전 상태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라는 뜻에서 사용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미술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랜 된 것은 구석기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년전의 동굴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그려지고 조각된 것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창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술적인 것으로 사료된다. (원시인들은 무엇이 그림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를 잘 분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창에 찔린 동물들을 보면서 동물보다 자신들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공포심을 제거하여 자신있는 사냥을 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주술적인 힘을 빌리려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괴이한 모양의 물건들에 자신의 상징을 새겨 넣는 과정에서 이른바 부조라는 것을 창조하게 되었을 것이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기원전 15,000~10,000 오스트리아)에서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사항(풍요와 다산이 아닐까?)을 작품에 실어서 표현한 것임을 추측 할 수 있다.
이 중에 현저한 유적들은 1912년에 프랑스에서 베구엥이 발견한 뒤끄·도두베르 동굴, 1923년에 가스트레가 발견한 몽떼스빵 동굴, 1927년에 마르땡이 답사한 르·로끄·드·세르 동굴등이다. 그리고 1940년에 이 고을의 소년들이 발굴한 라스꼬 동굴은 유명하다.

예술이란 항상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과 관련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사물에 대해 느끼는 방식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일반적으로 지식과 감정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 화가가 보고 또 알고 있는 것에 흥미를 가지는가, 아니면 느낀 것에 더 흥미를 가지는가에 따라 그림도 각각 달라지는 것이다.
인류가 채집경제에서 벗어나면서 질서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종교를 발생시키게 된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화를 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의 작품, 스톤 헨지 (기원전 15~19세기경, 영국)는 우리에게 어떤 경건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면서 초인적인 것을 느끼게 한다. (스톤헨지는 태양숭배의 기념물이다.) 이와 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와 작업에 있어서의 노동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동기가 되는 힘은 바로 종교적인 것이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며, 여기서 그들은 일상을 지배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 신석기나 구석기 시대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시시대의 미술 또한 우리에게 생활과 연계하는 많은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
원시적 주술의 유효성을 보이는 사나움은 구석기 시대의 수렵 주술에 있어서의 현실에의 충실함과 마찬가지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영웅들이 상징하는 그 의미를 상기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새를 머리에 얹은 남자상(BC 19~20C, 뉴기니의 세픽강유역), 수호자상(19~20C, 가봉)을 예로 들 수 있겠는 데, 이들의 공통점은 그 시기에 있어서 정령이 깃드는 곳이라는 믿음을 지녔던 곳이 머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미술 - 영원을 위한 미술 (B.C.3000 ~ 300)

기원전 5000년경에 이집트, 인도, 중국 등지에 흐르고 있는 나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인더스, 황해등의 비옥한 유역에서 각기 거창한 문명이 바야흐로 싹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곳들을 중심으로 왕이 통치하는 고도로 조직화된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또한 도시와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이집트에서는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시대로의 생활양식의 전환이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그들의 최고의 작품은 역시 회화였다.
이 작품들을 볼 때, 형상에 거의 사실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영효과가 없고, 벽에 밀착된 것처럼 평면적이고 형상의 세부묘사가 생략되어 있다. 약화법으로 간단히 그려진 단순화된 형상들은 서로 겹치지 않게 배치되어 있다.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관념없이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사지의 육체를 떠나 따로 삶을 누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후생활에 있어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육체가 필요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이집트인들은 미이라를 만들고 천으로 그것을 싸서 아무에게도 방해되지 않을 견고한 관에 넣었다.
또한 이집트인은 죽은 사람의 영혼도 살아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활용품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일상의 자재도구등을 분묘에 비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분묘에 매장이 불가능한 것은 묘실의 벽에 그림으로 그렸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에서는 분묘가 건축, 조각, 회화의 거의 모든 것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집트 미술은 문자 그대로 死者를 위한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중왕국 시대에 히크소스족의 침입으로 테베라는 도시를 제외한 전 이집트의 지배권이 넘어갔다.
그러나 기원전 1570년경 테베의 군주들은 침략자를 축출하고 이집트 전토에 통일된 지배권을 되찾았는데, 이와 같은 이집트 황금시대의 도래를 신왕국 시대라고 일컫는다.
이 시대의 미술의 특징은 2000년 전에 정립된 회화 및 조각의 엄격한 규칙을 답습하고 있기는 하나, 때로는 대담한 자유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규모에 있어서 아주 큰 것이 있는가 하면, 섬세하고 우아한 작품도 엿볼 수 있다.
헤시라의 분묘에서 보았던 법칙을 따르고 있는 작품이 발견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전작에서 발견되지 못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전의 미술 작품을 지배하고 있던 모종의 질서에 대해 상당부분 자유로와 졌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측면과 정면 시선이 서로 교차되고 있었던 고왕국 시대의 작품에 비해, 측면 시각의 사용을 억제한 작품도 등장하고 있다.
아크나톤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양상은 더욱 두드러지는 데, 이는 수도를 옮기면서 활기찬 새로운 양식의 미술을 장려하였다.
아크나톤의 부조상을 보게 되면 이러한 과정을 극명하게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아크나톤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의 흉상에서도 볼 수 있다.
채색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자연스러움과 사실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 미술

북방에서 그리스 본토로 이동해 온 도리아족은 선주 민족을 정복하고 이들의 문화에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더하여, 서양 문화의 모체인 눈부신 그리스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스인은 초기에는 이집트인처럼 형태를 중시한 개념적인 작품을 만들기는 했어도 생각하는 근본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생각했고, 또 세계 최초의 민주정치를 발명한 그들의 마음 밑바닥엔 현실의 인간을 모든 세계관의 척도로 하는 사고법이 있었다.
이 정신이 미술을 형식주의에서 탈피시켜 바로 자연주의에로 이행시켰던 원인이었다.
그리스 미술의 특징은 이상미, 조화미, 균형미를 추구하고 인간 중심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으로는 신전 건축이 중심이고 조각은 수학적인 비례에 의해 인체의 이상미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리스 미술은 서양 미술의 근원이라 칭한다.
그리스 미술은 세 시기로 구분한다.

1. 아르카익 시대(기원전 7세기~6세기)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의 아르카익 시대에는 소박하고 신선한 미를 추구했다.
소아시아,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인상 조각으로 대표된다. 정면성의 법칙, 치졸한 안면 표정, 이른바 아르카익 스마일이라 불리는 미소를 특색으로 한다.
아르카익 초기의 조각은 강한 정면성(正面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훗날 그리스 조각이 개척한 충실한 관찰에 기초하는 자연적인 표현과 거리가 멀다. 육체의 각 부분의 조립을 사실에 입각한 묘사적 의지에 의하기 보다는 견고한 형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구축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개발 정신으로 현대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미술을 탐구하고, 도입한 선구자들은 코레의 '소녀상', 코우로스의 '청년상' 등이 대표적이다.
아르카익 시대 중기로 가면 주제와는 관계없는 가로 기어 다니는 뱀이나 괴수를 박공벽 끝의 좁은 공간에 넣어 공간을 해결하였다.
이 시대의 말기로 가면 그리스 미술 특유의 충실한 관찰을 기본으로 한 묘사가 더해져서 아르카익 초기의 구성주의는 뒤로 밀려 나갔다.
그것은 아르카익 스마일의 소실이고, 유각(遊脚)의 탄생이었다.

2. 클래식(고전) 시대(기원전 5세기~4세기)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의 클래식(고전) 시대에는 조화미, 이상미를 추구한 그리스 미술의 전성기였다.
아르카익에 나타난 그리스인의 창조력은 클래식 시대로 가면 묘사주의의 확립을 가져왔다.
이 클래식 시대의 전기에는 저명한 3인의 조각가가 있었다.
뮈론, 페이디아스,폴뤼클레이토스이다.
뮈론은 운동의 순간적인 자세를 표현하는데에 재능을 발휘했다. 감정의 절제된 운동미를 잘 표현한 '원반 던지는 사람' '아테네와 마르쉬아스'에서 볼 수 있는 뮈론의 의도는 예리한 관찰에 의해 인체의 구조를 밝히며 그것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페이디아스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신 그것을 나타냈다'라고 할 정도로 칭찬되었는데 조각의 형태를 통해서 그 배후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파르테논 신전의 장식 조각', '렘노스 섬의 아테네 여신상', '아테나·렘니아'는 이런 페이디아스의 특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
페이디아스의 이런 정신 내용을 드높이려는 이상주의에 대해서 외형의 이상미를 추구한 것이 폴뤼클레 이토스이다. 그는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두부가 전신의 7분의 1일 때 드러난다고 하여 '창을 든 사람' '승리의 머리띠를 매는 사람'을 만들었다. 미를 수치로 나타내려는 데에 그리스인의 이지적·합리적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신전 건축은 장중하고 남성적인 도리아식과 우아하고 여성적인 이오니아식 신전이 발달되는데 도리아식의 대표적인 것으로 익티노스가 설계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데 파르테논 신전은 페이디아스의 조각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오니아식 신전의 대표적인 것으로 '에렉테이온 신전' 과 '니케 신전' 이 있다.

3. 헬레니스틱 시대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의 헬레니스틱 시대는 세속적이고 감성적인 화려한 미를 추구했다.
격동적이고, 극적이고, 관능적인 것은 클래식 시대와는 다른 방식이다. 자연이나 현실의 관찰이 세밀해지고 사실 묘사가 행해져 초상 조각이 발달하기도 하고, 소재 범위도 확장되어 노인·다른 인종·동물들과 그 밖에 세속적인 것들이 다루어진다.
관능적인 묘사로서는 많은 비너스 상이 있는데 헤르메스와 '크니도스의 비너스', 밀로섬에서 출토되어 8등신의 비례미를 잘 표현한 '밀로의 비너스'가 있다.
운동감을 주는 표현으로는 사모트라케에서 출토되어 날개·옷주름등을 이용하여 움직임의 착각을 강조한 '니케 여신상', 격정의 표현으로는 '라오콘 군상',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의 부조', 다른 인종과 결합한 것으로는 '죽어가는 갈리아 인', '자살하는 갈리아 인과 그의 부인' 등의 조각이 있다.
헬레니스틱 문화는 서로는 로마에 유입되어 서양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동으로는 인도에까지 이르러 간다라 미술과 아쇼카 왕 치하에서의 불교 미술을 탄생시킨다.

 

*로마미술 (기원전 1,000년 ∼ 395)

그리이스 패권을 둘러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헬레니즘 제국과 카르타고의 싸움이 치열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로마 공화국이 그리이스인들보다 정치력과 군사적으로 우세한 힘을 기르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리이스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의 그리이스 세계정복은 평소 그리이스 미술에 절대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이스의 미술을 단번에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국제적 성격을 띤 미술을 전파하게 된다.
그리이스와 로마 미술이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것은 로마 시대때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리이스 출신이던가 거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로마인들은 그리이스 시대의 미술품을 복제하거나 수집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그리이스 미술을 그대로 복제한 것만은 아니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리이스 형식을 변형하였다. 로마인들은 멀리 북아프리카, 영국, 스페인, 페르시아만, 카스피해까지 그 들의 우수한 유물을 남기게 되었다.

1. 건축
로마인들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토목공학을 얘기할 수 있다. 그들의 건축은 공중목욕탕, 도로,수로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은 그들의 정복자로서의 자신감과 실용적 가치를 추구한 일면을 엿보게 한다.
예로 콜로세움은 로마 건축 중 가장 유명한데, 이것은 거대한 투기장으로 내부에 계단식 관람석을 받쳐 주는 아치들인 세개의 층 각각에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의 세 가지 건축양식을 사용한다.
이것은 로마식 구조와 그리이스 형식과의 결합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고 이 후의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이 건축물에 아치와 궁륭을 사용했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또다른 업적이다.

2. 조각
로마인들은 주로 그리이스의 조각을 모방, 수집하여 그들의 화려한 저택을 치장하는 데 사용하였다.
로마의 조각은 초상 조각과 설화적 부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초상 조각에서 그들은 전쟁 영웅의 두상을 신성의 지배력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 영웅적으로 이상화하여 제작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초상이 인물의 미묘하고 심리적인 묘사에 치중하였다면 로마의 초상조각은 훨씬 사실적이고, 치밀했으며 정확하고 의지력 있는 개성적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선조의 모습을 미이라로 만들던 풍습과 연관된 듯한 관심이 로마에도 있었는데 그것은 사자의 초상을 밀랍으로 만들던 것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더 견고한 대리석으로 초상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인보다 더 실물처럼 있는 그대로의 초상제작에 힘썼다.
설화적 부조에서는 로마의 황제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적 사건을 과시하기 위한 기록으로서의 면을 보여준다. 그리이스 인들이 신전의 프리즈에 새겨넣었던 주제가 일상적인 행렬이었다면 로마인들은 일시적 사건을 다룸으로써 로마 조각가들의 예술적 의도가 기록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로마인들은 부조제작에 있어서 환조처럼 느껴지게 하는 깊이감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3. 회화
로마인들이 제작한 회화는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그당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던 이집트에서 발견된 유물로 로마의 회화를 짐작해 볼 수 밖에 없다.
조각에서 처럼 회화에서도 그리이스의 화가나 최소한 거기서 교육받은 사람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으로 보아 그리이스 회화의 특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파이윰에서 발견된 소년의 초상은 납화법으로 그린 패널화인데, 이것은 내구성이 강한 엔카우스틱 기법(납화법. 뜨거운 납을 섞은 안료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고대 회화의 중요한 기법으로 기원전 4세기경 파우시아스가 완성했다. 주로 천정의 패널에 조그마한 인물들을 그릴 때 사용했다.) 으로 색채가 밝고 생생하다.
이 기법은 로마 벽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명 프레스코(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 이태리어로 신선하다 는 뜻. 덜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 그림물감이 표면에 애어들면 벽이 마르면 그림은 완전히 벽의 일부가 되어 물에 용해되지 않으며 수명도 벽의 수명만큼 지속된다. 석고가 마르 기 전에 빨리 그림을 그려야 하며 그림의 수정도 불가능하다. 기념 건조물의 벽화 그리기에 적합하다. 건조한 지방에서 가장 영구적. 이탈리아에서 많이 사용 ) 와 함께 벽장식에 이용되었다.
로마 벽화는 1979년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당시 묻힌 나폴리 부근의 폼페이와 그 밖의 곳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이들 벽화 그림에서 로마인들은 완벽한 단축법과 빛과 그림자에 의한 정교한 모델링으로 사물이 실물 과 같은 입체감을 띠고 있고 미약하게나마 원근법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각에서와 같이 회화에서도 그리이스의 것들보다 훨씬 깊이감이 있는 공간을 표현했다.
로마의 미술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 그리이스 미술의 전통을 잇고 그들의 미술을 수용, 모방, 수집하여 나름대로 필요한 부분을 차용하였으며 무수한 복제품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로마 미술은 그들의 정복지역의 종교와 관습등과 어울려 국제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며 신과 영웅들의 아름다운 형태를 시각화하는 방법을 후대에 가르쳐 주었고, 이것은 서양 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중세초기 미술

로마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예술가들에 의한 초기의 회화들이 있다.
이들 그림은 초기 그리스도교 들이 사자를 매장한 지하묘소, 즉 카타콤(지하묘소)의 벽과 전장에 그려진 것들이다.성 피에트로에 마첼리노의 카타콤 천장화(4C초, 로마)을 보게 되면 로마의 이교도 그림 양식을 답습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인물상들의 자세가 경직되어 있고 약간 평평한 면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이다. 이 카타콤에서는 현세에서의 행복보다는 구세주와 내세의 생활에 집중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를 알아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화가들이 갑작스럽게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 은 아니고, 상징,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다른 존재세계에 속하는 것,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형태 또는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각 장면으로 구획하며 또 결합시키는 그림의 틀은 그 자체가 복잡한 상징적 구조이며 각 틀의 장면도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카타콤
4세기(311)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계기를 만들어 이곳저곳에 거대한 성당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광대한 벽면에 그릴 그림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이에 비해 카타콤은 상대적으로 너무 소박한 그림이었고, 이는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계기를 창출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벽면 모자이크를 만들어낸 장본인 들이었다. 이것이 주는 효과는 여지껏 카타콤이 주는 초라함을 한층 웅장함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2. 채색사본
이러한 설화적인 모자이크를 생각한 사람들은 성서에서 그 소재를 찾아왔다. 이러한 성서를 사본화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벽화나 모자이크, 패널화의 예술성에 필적하는 작품을 생성해내었다.
이것들의 초기 양식은 그리스,로마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채색사본의 등장으로 한정된 화면 안에 많은 얘기들을 효율적으로 넣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3. 비잔틴 미술
4세기로부터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미술이 상대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몰락을 겪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에서 6세기에 이르러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 데, 이를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5∼15세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정교회 사회에 발전한 그리스도교 미술.
단 4세기 이전에도 준비 시기가 있었으며(예를 들면, 시리아의 두라 에우로포스 유적), 고대로부터의 탈피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종교 교의(敎義)·정치·군사 상의 이유로 6세기 이후 제국(帝國)의 중심으로부터 점차 분리하여 자립한 여러 지역이 있다. 콥트(이집트)·누비아·에티오피아·시리아·팔레스타인·아르메니아·게오르기아·불가리아·세르비아·러시아 등이 그곳으로, 그 지역의 미술은 비잔틴미술과의 연결은 다소 있으나, 각각의 독창성이 차차 인식되어 갔다.
이러한 것들은 비잔틴미술의 틀에서 나온 것으로, 오히려 동방정교회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야 한다. 비잔틴미술은 그 시대적·지리적 위치로,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뒤를 이어 그 전통에 고대 아시아의 전통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을 더하고, 신흥 그리스도교를 정신적 기초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흥륭하였다.
또한 이슬람 미술과도 어느 정도 교류하면서, 약간의 시대적 변화와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가지고 10세기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처럼 비잔틴미술은 고대 이집트 미술과 함께 생명력이 있는 미술로 평가되고 있다. 보통 이것을 3기로 나누며, 전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로부터 아이코노클래즘[聖畵像破壞]의 마지막까지(6∼9세기), 중기는 마케도니아 및 콤네노스 왕조(9∼12세기), 후기는 팔라이오로고스 왕조(13∼15세기)이다.
【건축】 비잔틴 건축가는 토목공사나 궁전건축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콘스탄티노플의 빈 비르 딜레크[千一柱]라고 불리는 지하 대저수소(大貯水所) 등에서 그 편린이 엿보이나 건축의 주요한 것으로는 성당이다. 성당 건축은 한편으로는 종교의식이라고 하는 기능에 따른 계획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집이라고 하는 강한 상징적 성격을 가진다.
종교의식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위해서는 사제(司祭)를 위한 제실(祭室) 및 내진(內陣)과, 신도(信徒)를 위한 신랑(身廊)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대 말기의 공공건축의 종장식(縱長式:바실리카식) 설계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 제실은 거의 언제나 반원상(半圓狀)으로 돌출하고, 반원 모양의 지붕을 덮었다. 이 반원 모양의 지붕은 신의 자리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로는 오히려 원 모양의 지붕이 상징성이 강하다. 원 모양의 지붕을 씌운 집중식 건축은 성스러운 천계(天界)로 덮인 종교적 공간을 구성하고, 그 원형은 고대 로마에도 있으나 5세기부터 세례당(洗禮堂), 묘당(廟堂), 순교자 기념당 등으로 우선 발달하였고(라벤나의 갈라 플라키디아 묘당 등), 그것이 점차 대형화하여 성당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전례(典禮)를 위해서는 제실과 주랑(主廊)을 직선으로 늘어놓고 다시 거기에 전실(前室:세례 지원자용)과 앞뜰(일반인용)을 추가한 종장식 설계가 편리하므로 집중식의 경우도 대부분 바실리카 구조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6세기 수도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성당건축의 상징성은 십자가를 본뜬 평면 설계에서도 보인다. 바실리카에서는 제실 앞쪽의 한 구획이 좌우로 뻗어 익랑(翼廊)을 형성하고, 라틴 십자가를 묘사한 것이 보이며(단지 이것은 유럽에서 특히 현저하다), 집중식에서는 사방에 같은 길이의 가지를 뻗게 하여 그리스 십자가를 본뜬 것이 통례이다. 바실리카식이 비잔틴 중기 이후 차차 쇠퇴한 데 비하여 집중식은 그리스 십자형의 설계를 고집하면서 여러 유형을 발달시켜 나갔다.
【장식미술】 장식은 특히 건축 내부에 집중되었다. 이 경우 장식이란 단순한 벽면 미화가 아니라, 조형적 수단에 의하여 공간 내부를 성화(聖化)하여 거기에 초자연적인 세계를 현실에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 또는 성스러운 공간은 현세 또는 물질계의 것처럼 나타내면 안된다. 이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보다도 빛이며, 빛의 구성 요소로서의 색채이다. 이리하여 십자가, 여러 종교 용구, 제단 등이 황금·보석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비단 등을 사용한 호화로운 염직품이 귀하게 여겨졌고, 건축장식으로는 색유리를 많이 사용하는 모자이크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 전형적인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풍부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비용과 수고가 드는 것이므로 시대 또는 경우에 따라 벽화가 이를 대신하였다. 어쨌든 그 표현양식을 보면 무엇보다도 색채의 효과가 중시되어 3차원적인 표현에서 입체감이나 원근 표현은 되도록 피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성스러운 자나 성스러운 장면의 물질화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성상(聖像) 표현을 우상숭배라 하여 부정하고 아이코노클래즘 운동을 8∼9세기에 걸쳐 흥륭시켰다. 마케도니아 왕조 이래 성상 미술은 또다시 흥하지만 그것도 모자이크·벽화·아이콘으로부터 사본 등 따위 색채 미술의 각 분야에 걸쳐 있다.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3차원적 성격의 강한 조각미술이 끝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유대교 이래의 전통인 우상에 대한 강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조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기둥머리, 내진 장벽 등) 주제의 대부분은 추상적·상징적이며, 사람의 상을 표현하는 경우에도 거의 평면예술에 가깝다.


*로마네스크 미술

10세기 중반 카롤링거 왕조의 분열이후 세력을 잡은 오토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자신의 세력을 위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황제 승인을 받으려 노력하였다.
972년에는 오토2세가 비잔틴의 테오파노 공주와 결혼하면서 게르마니아 지방에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기도 했다. 또한 이시기에는 노르만 족, 헝가리 족, 사라센 족들의 침입이 종식되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가 발전하고 예술활동이 활발하였다.
11세기에는 카놋사의 굴욕등, 교황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시기였으며 성상파괴 문제로 인해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로 교회가 분열되기도 했다.
11세기 후반에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로마네스크 미술은 “교회의 승리”대표라 할 수 있다. 유럽 전역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의 일반이 교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딕미술

서양의 중세는 원시적인 방식과 세련되고 복잡한 방식이 기묘하게 혼합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거쳐 수도원 중심의 문화권에서 도시의 성장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성당 중심의 문화가 도래한다.
성당은 많은 수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주인 사람을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갖게 했다.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신의 완벽한 반영을 목적으로 하는 당시 중세의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중세인을 하나로 묶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 종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뿐 아니라 고딕 양식에 있어서 모든 미술의 목적이 단지 종교의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학문이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당시의 기술이나 지식 또한 발전하고 있음 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고딕 양식은 특히 성당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평가를 받게 되며 이와 함께 조각, 회화, 공예까지 확대 발전하게 된다. 4세기의 비잔틴 미술에서 중세가 끝나는 시점으로 보는 14세기 까지를 중세로 볼 때 고딕 양식은 중세의 모든 미술 양식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라 하겠다.


*초기 르네상스

14세기 중반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배경을 보면
첫 번째, 이탈리아에선 귀족계급과 부유한 부르조아 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두 번째,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하는 등 고전시대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 번째, 도시의 자부심과 사유재산제가 잘 발달되어 예술에 대한 후원의 기회가 많았다는 것등이다.
특별히 지옷토와 단테의 출생지였던 부유한 상업도시 피렌체에선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흐름 이 강하게 나타났다. 피렌체는 새로운 아테네로 부상될 만큼 시민예술의 야심찬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예술가를 엘리트 집단 으로 인정하는 등 미술가의 지위가 향상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들 수 있으며 그는 원주와 벽기둥, 아치를 자기식대로 결합, 표현하였으며 원근법, 소실점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를 뒤이어 알베르티가 건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그는 벽과 창문을 가진 재래의 집과 브루넬레스키가 권장한 고전형식을 절충하여 개인 주택에 적용하는 건축기술을 보여 주었다.
15세기 최고의 조각가 도나텔로는 로마의 유적을 제계적으로 연구한 르네상스의 아버지이다. <성지오르지오>나 <죽코네> 모두 고전 예술에 있어서의 균형 잡힌 움직임의 의미가 회복되었으며 고대 로마 조각을 재현, 새로운 도상으로 재창조하였다.
플랑드르 화가들의 나체상이 '발가벗겨져 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 반해 이탈리아 조각가들의 나체상은 고대 조각의 이상을 추구하여 인간의 상체를 구조체로 다루었으며, 옷은 신체를 감싸는 듯하게 표현되었다.
경쾌한 아치 대열과 고린트식의 기둥이 잘 표현된 천국의 문,<야곱과 이삭의 얘기>의 기베르티는 선명하고 수학적으로 정확한 원근법 을 구사하였으며, 테라코타에 전념한 롭비아와 로마조각보다 더 개성적인 대리석 조각가 롯셀리노 도 유명하다.
다빈치의 스승인 베록키오는 사방으로 뻗쳐 있으나 우아하고 연속적인 동작을 보여주는 <돌고래를 안은 동자>를 조각했다. 베록키오는 어떤 의미에서 도나텔로의 폭넓은 세계와 대담한 예술적 야망에 필적했던 작가였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

17세기 유럽전역에서는 바로크의 궁정풍 문화가 유행했으나 네덜란드에서만은 시민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술이 전개되었다. 도시국가 연합을 형성하고 있던 홀란드 북부의 자유도시국가들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고, 국가의 부는 국가나 왕정에게 돌아가지 않고 시민계급이 차지하게 되었다.
교회의 구속에서 벗어난 네덜란드에서는 그 주제에 있어서 성화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소재들의 묘사, 풍속화, 초상화, 풍경화, 실내화, 건축화 등이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스케일 역시 궁정이나 교회가 아닌 개인의 일상생활의 용도에 맞는 조그만 규모였다. 따라서 조형예술 중에서도 가장 겸손한 예술인 회화, 또 그중에서도 가장 소박한 형식인 내실 장식용의 소형그림이 지배적인 장르가 되었다.


*서양미술사-19세기 낭만주의 미술

Ⅰ. 낭만주의미술의 탄생
낭만주의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에 전반에 걸쳐 유럽에서 전개된 미술 운동으로 예술가와 자연 사이의 신비스러운 교감 및 개인주의, 열정과 감수성, 상상력의 강조, 묘사적이고 섬뜩하며 이국적인 경향을 띤다. 본래 낭만주의는 인생에 있어서의 기본적 태도와 관련된 것으로 광범위하고 다양한 양식을 가지며 계몽주의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당시는 역사에 대한 자각과 전체 구조에 대한 인식, 자연에 대한 고조된 감정이 일어난 시기였으며 더불어 낭만주의에 있어 중요한 사회적 요소인 민족주의 감정, 사회주의 등이 출현한 시기였다. 또 낭만주의 작품에 보이는 꿈․신비․밤․무한성․이국땅에 대한 향수 등은 지성의 한계까지 탐구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필요성’ 내지는 ‘이성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한편 낭만주의미술은 신고전주의미술과도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둘 다 눈 앞의 현실세계로부터 이탈하여 동양이나 아프리카, 남태평양의 인상이 불러 일으키는 어떤 현실로, 혹은 고전적 고대나 중세, 르네상스 예술 및 문학으로부터 파생된 가공의 세계로 도피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의 뚜렷한 차이는 특히 회화에 있어 조형적 형태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잘 드러나는데, 먼저 신고전주의는 르네상스 전성기나 푸생적인 고전적 바로크까지 뛰어넘을 정도로 균형잡힌 정면성의 원리를 확립한 반면, 낭만주의는 내적 상상력의 표현에 적합한 비대칭, 깊이의 묘현에 있어서의 사선구도, 애매모호한 분위기 위주의 색채효과라는 공식으로 복귀했다.
본래 ‘낭만주의’란 용어는 ‘영국식 풍경정원(English landscape garden)’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즉 1745년에 프랑스人 르블랑(J. Leblanc)은 “일부 영국인들은 정원을 소위 낭만적인 모양으로 꾸미려고 애쓰는데, 이말은 생생하게 꾸민다는 것과 거의 같은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풍경정원으로 인해 흔히 영국은 낭만주의의 발상지로 인정된다.

 

 

 

<<원시미술>>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미술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랜 된것은 구석기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년전의 동굴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그려지고 조각된 것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창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술적인 것으로 사료된다. 창에 찔린 동물들을 보면서 동물보다 자신들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공포심을 제거하여 자신있는 사냥을 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미술속의 형상은 현실적인 것과 똑같은 힘을 같는다고 믿었으므로 다산을 기원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기원전 15,000~10,000 오스트리아)를 만들기도 하였다.


<<고대미술>>

1)이집트 미술 (B.C 3500-500)

기원전 5000년경에 이집트, 인도, 중국 등지에 흐르고 있는 나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인더스, 황해등의 비옥한 유역에서 각기 거창한 문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시대로의 생활양식의 전환이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관념없이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사지의 육체를 떠나 따로 삶은 누린다고 믿었다.
이러한 고대 이집트인의 사고 덕택에 이집트의 미술은 초시간적, 영속적기능을 하게된다. 또한 죽은자를 위한 미술이므로 아름다움보다는 미술작품에 영원성을 담으려했다. 예로 파라오 왕이 죽은후에도 생전과 같은 절대권력의 소유와 승천을 돕기 위한 [피라미드]를 들수있다. 그리고 그들은 명확하고 완전한 묘사를 위해 특징적인 각도와 전형적인 상황을 묘사했는데, 주인은 종보다 큰 점, 좌상의 경우 두손은 무릎위에 놓는 점, 남성의 피부색이 여성보다 검은 점, 모
든 인물이 어떤 기저선상에 놓이는 점 등이 예라 할 수 있다.
3000년간 지속된 이집트 미술은 비교적 정확한 부분묘사와 균형있는 신체비례를 보이는데, 이는 그들의 질서감각과 기하학적 규칙성을 보여준다.


2)메소포타미아 미술

기원전 3500년경에서 3000년에 걸친 기간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낀 비옥한 땅에서 수메르인들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태동한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는 모두가 신의 소유로서 신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다. 그래서 신을 대신하고 있는 신관이 모든 국가의 행정을 통치하고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은 신전을 중심으로 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메르의 조각은 건축보다 많은 양의 작품을 아직까지 남기고 있는 데 그것이 바로 돌로된 소형 인물상군이다. 수메르의 조각가는 금속이나 나무를 재료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고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이집트 미술가와 비교하여 훨씬 규칙에 속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그리스 미술 (B.C 7 - 4)

그리스 미술에서는 사물을 보는 시점이 이전의 왜곡된 방식이 아닌 올바른 방식으로 발전하여 이집트 미술에서 보이는 평면성에서 벗어나 공간감을 얻게 되었다. 공간감의 획득은 형상이나 인물 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설득력 있게 전달할수 있도록 하였고, 이것을 그리스 미술의 서술적기능(Narrative function)이라 한다.
그리스 미술을 크게 전기, 후기 헬레니즘으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전기 그리스미술 (B.C7 - 5)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미술이 극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미술의 서술적기능이 태동한 시기이다. 또한 원시적인 신들에 관한 전설이나 신화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함으로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시기이다. 따라서 기하학, 자연과학, 철학등의 학문이 아울러 발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미술로 도리아식 신전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을 들 수 있다.

후기 그리스미술 (B.C5-4)
페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여 정치적 번영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미술가들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다양성을 후기 그리스 미술의 특징으로 들 수 있으며 대표작품으로 갸날픈 기둥에, 곡선이 가미된 기둥머리를 지닌 이오니아 양식으로 건축된 [에렉테움 신전]을 들 수 있다.

헬레니즘 미술 (B.C4-A.D1)
알렉산더 제국하의 미술양식을 말한다. 소아시아와, 인도국경, 이집트까지 영토확장을 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서방의 문화가 혼합되었고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하고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이전의 기둥양식 보다 훨씬 강하고 화려한 인상의 코린트식 건축 양식을 들수 있다.
또한 조화와 균형보다는 제국의 위용에 걸맞는 강렬한 극적효과, 거칠고 인상적인 효과에 주력하였다.
격렬함과 긴장감으로 충만되어진 리시포스의 [라오콘]상은 이러한 특징을 잘 나타낸다. 대표작품으로 사모트라케섬의 [니케상], 밀로의 [비너스]를 들수 있다.

4) 로마 미술

그리스 패권을 둘러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헬레니즘 제국과 카르타고의 싸움이 치열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로마 공화국이 그리스인들보다 정치력과 군사적으로 우세한 힘을 기르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리스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의 그리스 세계정복은 평소 그리스 미술에 절대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스의 미술을 단번에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국제적 성격을 띤 미술을 전파하게 된다. 그리스와 로마 미술이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것은 로마 시대때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리스 출신이던가 거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로마인들은 그리스 시대의 미술품을 복제하거나 수집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그리스 미술을 그대로 복제한 것만은 아니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리스 형식을 변형하였다.


5)비잔틴 미술
4세기로부터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미술이 상대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몰락을 겪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에서, 6세기에 이르러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 데, 이를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세미술 MIDDLE (A.D 5c - A.D 15c)>>

중세는 초기 500년동안은 전쟁과 약탈, 혼란한 정치가 계속되는 일종의 암흑시기(Dark age)였다. 그리고 예술은 기독교 교리전달의 보조수단이라는 신(神) 중심의 인간관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였으므로 예술에 있어서도 암흑시기였다.
중세는 초기미술과 로마네스크, 유비법 붕괴 이후의 고딕양식으로 분류된다.

1)중세초기
미술은 단지 문맹자들에게 신의 섭리와 교리를 전달하기 위한 보조수단이라는 생각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그들은 신(神)적이고, 영원하며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바꾸는 데 미술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미술가의 재능은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것 이므로 당연히 신에게 바쳐져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이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뚜렷히 통일된 하나의 양식이 나타나지 않은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 로마네스크 미술

11세기 후반에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로마네스크 미술은 “교회의 승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전역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의 일반이 교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대 로마의 건축양식과 흡사한 교회가 많이 건축되었으며, 단단하고 육중한 모습의 석조건물로서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전투적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조각이나 회화는 중세초기에 비하여 비교적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우나 여전히 교리전달의 보조수단이므로 교회의 내부장식에 이용되었다.

3)고딕양식 (A.D13c-14c)

12C 말 프랑스 북부에서 발생한 미술양식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의 세계를 가시화 시킬수 없으므로 인간능력의 것을 충실히 나타내려는 시도(유비법의 붕괴)가 생기면서 원근법, 인체묘사, 형태등에 관심을 쏟아 이후 르네상스 발생의 초석이 된다.
로마네스크의 둥근 아치와는 달리 뾰족한 첨형아치가 특징이다. 또한 로마네스크 교회건축물과는 대비적으로 가느다란 석재기둥 및 유리(스테인드 글라스)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내부가 밝고 넓어지게 된다. 대표적 건물로 프란체스코 교회를 들수있다.

유비법이 붕괴되었고 이후 르네상스의 초석이 된다.
건축물은 첨형아치와 스테인드 글라스가 사용되었다.


4) 르네상스
RENAISSANCE (A.D 1400 - A.D 1600)


르네상스는 부활(復活), 재생을 뜻하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 번영을 꿈꾸며 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배경을 보면 첫번째, 이탈리아에선 귀족계급과 부유한 부르조아 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두번째,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하는 등 고전시대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 번째, 도시의 자부심과 사유재산제가 잘 발달되어 예술에 대한 후원의 기회가 많았다는 것등이다. 중세 봉건영주, 귀족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권리와 능력을 자각한 시민계급의 등장은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낳았고, 이는 중세를 지배하던 신중심의 시선을 인간중심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피렌체의 메디치가 처럼 부를 축적한 상인계급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여 미술의 새로운 후견인이 되었다.

초기 르네상스(Quatrocento, 1400년대)
현실적, 객관적 정확성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그림전체의 조화로운 구성에는 아직 소훌하였다. 화면속 대상 개체의 사실적인 묘사에만 주력하였으므로 개체는 날카롭고 명확한 윤곽선으로 도려지게 되었다. 격렬한 동세를 하고 있는 소재들은 고전작품에의 제재를 따온 것으로 파악된다.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을 보면 이러한 아직은 미숙한 르네상스의 미술의 특징을 잘 알수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도나텔로(1386-?)<성지오르지오상>, 보티첼리<비너스의 탄생>을 들수 있다.

전성기 르네상스(Cirquecento, 1500년대)
이성적 규칙을 통한 객관적인 정확성과 조화와 균형이라는 미의 이념이 잘 구현된 황금기다. 다른 어떤 세기보다 많은 천재들이 나타났으며 가장 두각을 나타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이다.

후기 르네상스 (Mannerism, 16c중엽부터 말)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경향들을 이르는데 흔히 평가절하되어 온 경향이기도 하다. 즉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형식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전대의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했다고 간주되어 창조성에서 의심을 받았다. 전반적인 그림들에서 느겨지는 불안감, 신비감,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 과정된 인체비례에서 시대정신의 한 면의 표출로 보기도 한다. 특히 파르미지아노(1503-1540), 틴토렛토(1518-1594), 코렛지오(1489-1534), 엘 그렛코등이 대표적인 매너리즘 작가로 꼽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양식적 특징으로는 인체의 장신화, 차갑고 선명한 색조, 표면처리의 매끈함, 원근법의 과장, 비논리적인 공간배치 및 대가그림의 일부 차용 등을 들수 있다. 반면에 긍정적인 측면을 들수도 있다.
이전 르네상스 양식의 이성적 접근은 미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며, 새롭고 색다른 감성적 시도를 하였다는 점에서 매너리즘은 긍정적이다. 이러한 점은 이후 바로크 미술의 계기가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파르미지아노의 <목이 긴 성모>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틴토레토의 <최후의 심판, 만찬>을 들수 있다.
후기 르네상스는 매너리즘으로 불리며 예술적 기교에 치우친 타성적 예술이다.


5) 바로크 BAROQUE(A.D 17C)


1600년부터 1750년 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르네상스의 이성적 규칙에 의한 지나친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부터 발전한 미술양식을 뜻한다. 바로크는 포르투칼어의 '비뚤어진 진주'라는 뜻으로 르네상스가 지닌 단정하고 우아한 고전양식에 비해 장식이 지나치고 과장된 미술양식에 대한 경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혹은 르네상스가 지니고 있는 고전적인 균형, 조화의 세계에 비하여 유동적이고 강렬한 남성적인 감각이 강조되어 붙어진 이름이라 한다.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으로 카라밧지오<야경>, 베르니니<다윗>, 루벤스<루시퍼스의 딸들의 능욕>, 램브란트<자화상> 등을 들 수 있다.

6) 프랑스식 고전주의 CLASSIC IN FRANCE (17C)

17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풍요롭고 강력한 국가였다. 그 결과 예술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적 철학의 영향과 루이14세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안정은 프랑스를 바로크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독자적인 양식을 갖도록 하였다. 대표적인 작가로 니콜라 푸생을 들수 있는데 그의 작품 <사비니 여인들>을 보게 되면, 감상보다는 지성에 호소하는 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구도나 형태만이 강조되고, 색채는 아에 뒷전에 밀리게 되었다. 영웅적인 인물들은 일반화 되었으며, 동작은 조각처럼 굳어져 있다. 이들의 묘사는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에서 빌려온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7) 로코코 ROCOCO(A.D 18C)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 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 된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조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14세 사후,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되었다.

8) 신고전주의 NEO CLASSIC(A.D 18C말)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양식,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등이 우선시 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리클라네움, 파에스툼등의 고대건축의 발굴과 동방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근대미술>>>


1) 낭만주의 (A.D 19C 초)

간단히 말해 감성적 분위기의 작품들을 발전시켜 나간 형태라 할수 있다.
현실적인 사건을 주제로 다루기도 하고 이성의 규칙과 속박에서 벗어나 느낌에 따른 재현을 하였기 때문에 낭만주의로 불린다. <메뒤사의 뗏목>(1819, 제리코)이라는 작품으로 대표되는 데 사선구두와 명암의 극적대비, 어둠 침침한 단색조를 보인다. 낭만주의는 전시대의 미술들이 버리지 못했던 현상이나 사물의 재현이라는 모방론적 입각을, 에술가의 감정이나 정서의 표현이라는 표현론으로 바꾸게데 그 의미가 있다. 따라서 예술이 다양해지는 계기가 된다.

2) 사실주의 (A.D 19C 중엽)

19C 이전까지는 자연주의로서 사실주의가 정의되어왔다. 그것은 성실하고 정확한 '자연의 모방' 더 나아가 그것의 '완벽한 이상화된 재현'으로서 사실주의 였다. 19C 이르러 사실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사실주의 등장 이전의 낭만주의는 그 개념적인 면에서 대조가 된다. 낭만주의는 '감정'이 중요하고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 낭만주의 회화는 격정적이며 현실을 떠난 이상향을 쫒거나 이국적인 소재등에 깊은 관심을 회화로 표현한다. 표현에 있어서는 색채에 비중을 두고 화려하고 열정적인 화면을 구사한다. 현실을 떠난 상상력을 부추기는 소재는 따라서 시적이며 신화적인 주제를 취했다.
사실주의는 낭만정신에 전적인 반대 표명과 비판을 가한다. 특히 19C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쿠르베,도미에,밀레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관심사는 [현실을 보는 눈] 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쿠르베는 '천사를 보여주면 그리겠다'는 공언으로 사실주의의 개념을 대변하며 '상상력'으로 집약되는 낭만주의와는 대조를 보인다.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소재자체가 대조적인데서 비롯되어서 [사르드나팔르의 죽음] [메뒤즈의 뗏목]은 내용 자체가 극적이며 등장인물
도 격정적인 자세의 불안할 정도의 공간배치가 나타난다. 반면 사실주의는 [돌깨는 사람] [만종]등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정적인 모습과 그들의 현실공간을 재현해서 단순하고 차분한 구성을 나타낸다. 19C는 과학과 기술의 태동 이성주의의 팽배를 부른 계몽주의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실증주의는 경험과 관찰에 입각한 과학적인 지식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시민정신에 평등사상을 고취하는데 역할하였고 민주사상에 이어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더 이상 고고한 가식적 주제가 아닌 평범한 삶의 세속성이 주제로 등장하는데 정신적인 역할을 했다.

3) 인상주의 IMPRESSIONISM (A.D 19C 말)

인상주의
인상주의는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형태의 변화 색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미술양식을 말한다. 본대로 그린다는 인상주의 정신은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 없는 사물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태양광선의 미묘한 조화를 쫓기위해 이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튜브형 물감과 접히는 이젤의 발명은 그들의 야외작업을 가능케 해주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광선은 빠른 필치와 붓놀림을 요구하고 빠레뜨에서 색을 섞기 보다는 직접 화폭에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노리며 순색을 이용한 색체분할법(필촉분할법)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인상주의가 출현하는데는 사진기의 출현에 따른 재현적인 사실적 묘사가 회화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입증해준다.
대표적인 작가인 모네의 [건초더미] [루앙 대성당][수련]등의 연작에 있어
작품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은 태양광선을 위한 부차적인 소재인 것이다. 이 그림은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해야 윤곽과 형태가 드러난다. 화면의 구성도 삼각형구도나 소실점이 한두개로 축약되는 선원근법적이 아닌 대기원근법을 사용한다. 그 효과는 자칫 어수선해보이나 자연스럽고 우연한 느낌의 스냅사진과 같은 연출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화를 환영으로서 인식하기를 그만두고 '평면
성'의 회화를 구축하고 있다.
또한 직관에 의한 뉘앙스 이미지의 연출은 곧 추상회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것이라 할수 있겠다. 대표적인 작가로 마네, 모네, 르느와르, 드가, 로댕 등을 들 수 있다.

신인상주의(Neo impressionism)
신인상주의는 G.쇠라와 P.시냑으로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등의 이론과 수법 및 그 운동을 말한다. 그들은 광학이론과 색채학에 따른 과학적 이론에 기초한 색채분할을 구현하였다.
이들은 인상주의가 사용한 기법을 과학적으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반발하였다. 인상주의가 본능적, 감각적이라면, 신인상주의는 과학적이며 분석적이라 할수 있다.

후기인상주의(Post impressionism)
인상주의의 단계를 거치면서도 그 양식의 한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갖가지의 방향으로 인상주의
를 넘어선 일군의화가들을 가리킨다.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독자적으로 해결책을 추구하던 이들 작가군을 인상주의 이후의 세대라는 포괄적인 관점에서 `후기인상주의 화가'라는 명칭을 얻게된다. 이들은 이상주의가 지나치게 순간적인 시각세계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믿었기에 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미술을 추구해야함을 표방했다. 세잔느, 고갱, 고흐로 대표된다


<<<현대미술>>>

1) 야수파 (A.D 20C 초)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회화 운동으로 수년간 유사한 테크닉에 관심을 보였던 화가들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미술운동이다.
이 운동은 순수 색채의 고양에 주력했다.이 새로운 화법은 1899년, 그룹에서 주도적 인물이었던 마티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야수파라는 명칭은 당시의 비평가 루이 복셀이 1905년 가을 마르케의 15세기풍의 청동조각을 가리켜 마치 "야수의 우리 속에 갇혀있는 도나텔로 같다"라고 평한데서 유래되었다. 이 운동의 동인은 귀스타프 모로의 문하생이었던 마티스, 마르케, 루오, 앙리 샤를르 망갱, 샤를르카무엥 그리고 장 퓌이등과 '샤토'로부터 블라맹크와 앙드레 드랭, 그리고 프리츠, 브라크, 뒤피의 그룹이 융합된 것이었으며 네덜란드 화가 반동겐도 참여 했다. 그들은 고호, 고갱, 신인상주의, 세잔느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 작품들의 특징은 강렬한 순수 색채에 있었으며 색채는 때로는 세잔느처럼 공간 구성에도 사용했지만 대부분 감정 및 장식적 효과를 위해 임의적으로 사용했다.

2) 입체파 (CUBISM A.D 1900 - 1914)

1900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운동을 말한다.
1908년 마티스가 브라크의「에스타프 풍경」이란 연작을 평하면서 '조그만 입체 덩어리'라고 말한데서 유래되었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급격하게 발전한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세잔느풍의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잇다. 입체파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쓴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야수파의 주정적(主情的) 인 표현을 폐기한 대신 시점(視點)을 복수화하여 색 도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 시켰으며,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타블로로 구축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피카소, 브라크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고 그 밖에 몽파르나스에서 화면에 밝은 색채와 다이나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F. 레제와 R. 들로네가 있고, 화면의 구성원리를 추구하여 추상예술의 길을 열었던 쿠프카와, 비용, 뒤샹등이 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3) 표현주의 (expressionISM A.D 1911 - 1920)

표현주의는 야수파, 초기의 입체파, 인상주의,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연의 모방을 거부한 다른 여러 화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 비평가들이 1911년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다.
1911년 마르크와 러시아 출신 칸딘스키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절대 순수를 표현하고자 함으로써 절대주의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표현주의는 독일을 풍미하게 되었다. 청기사 그룹의 미술 가들은 더욱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을 제작했고 후배 세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 미래파 (FUTURISM)

미래파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위예술 운동을 일컫는다. 이 운동은 시인 필립포 마리네티가 효시인데, 마리네티는 기존의 낡은 예술을 모두 부정하고 기계 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다이내믹한 미를 창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자극되어 이듬해 2월 카를로 카라, 옴베르토 보치오니, 지노 세베리니, 루이지 루솔로, 쟈코모 발라의 5인의 화가가 연명으로 미래주의 화가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미래주의의 커다란 공적은 기계가 지닌 차가운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조형 예술의 주제로까지 높였다는 것과 스피드감이나 운동을 표현하기 위해 회화에 시간의 요소들을 도입하려고 시도한데 있다.
이 유파가 뛰어난 조형작품을 낳았다고 할 수 없지만, 현대에 있어서 예술의 소재에 대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한 의의는 크다.

5) 다다이즘 (DADAISM)

다다이즘은 1915~22년경 스위스, 독일, 프랑스등의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문명, 반합리적인 예술운동을 일컫는다.
제1차 세계대전을 낳게 했던 전통적인 문명을 부정하고 기성의 모든 사회적·도덕적 속박에서 정신을 해방, 개인의 진정한 근원적 욕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 이 운동의 근본 정신이었다. 이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또는 전후에 세계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독일에서는 반전운동과 코뮤니즘에 결합된 베를린 다다가 1919년에 결성되었다. 미국에서는 1912년경부터 프랑스의 화가 마르셀 뒤샹이 만 레이와 함께 뉴욕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뉴욕 다다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경향으로는 소위 레디메이드의 오브제 또는 움직이는 오브제, 콜라주 또는 앗 상블라주로 통하는 메르츠 빌트등이 시도되었던 점이다. 기계적, 성적인 이미지의 사용도 특색이다. 이들 수법은 다다의 강렬한 가치 부정적 관념과 함께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60년대 예술 등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6) 추상 표현주의 (ABSTACT expressionISM )


일반적으로 1940년대와 50년대에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미국 회화사상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회화의 한 양식이다. 본래 추상 표현주의라는 용어는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에 대해서 사용했던 말로, 미국의 평론가 알프레드 바가 1929년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칸딘스키의 초기작품에 대해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썼었다.
이 용어가 부적당하다는 견해도 있어서 비평가가 해롤드 고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추상표현주의는 서구 근대미술의 복합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야수파, 표현주의, 다다이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한 계보와 인상주의, 입체파, 기하학적 추상의 계보를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전통적인 추상은 구상 회화의 경우처럼 인간, 사물, 풍경등을 표현 대상으로 삼지 않지만 삼각형이나 원 따위, 선이나 면에 의해 생성되는 형상을 갖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것은 현대 회화의 한 특성으로 화면은 원근감을 잃고 평면화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라운드와 전경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는 구상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간에 지시성과 방향성을 거부한다.

7) 미니멀 아트 (MINIMAL ART)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최소한의 조형 수단으로 제작했던 회화나 조각을 가리킨다. 여기서 최소한이란 일루전의 극소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회화의 감동, 마티에르의 풍부함 내지 자기 표현은 곧 예술이라는 신화를 기본으로 하는 종래의 예술 개념을 거부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엘즈워드 캘리, 프랭크 스텔라, 도널드 주드, 케네드 놀런드, 잭 영거맨, 래리 푼즈, 모리스 루이스 등을 들 수 있다.


8) 팝 아트 (POP ART)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구상 회화의 한 경향이다. '팝'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포플러(popular)'의 약자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통속적인 이미지, 다시 말해서 일상 생활에 범람하는 기성의 이미지에서 제재를 취했던 이 경향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의 팝 아트는 1950년대 초기의 미국 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팝 아트는 미국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선배 작가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를 들 수 있다. 미국의 팝 아트는 흔히 발견되는 일상적인 이미지나 물체를 미술 작품으로 전환시키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 다.
팝 아트의 작가들은 일상의 이미지를 인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호나 기호체계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앤디 워홀, 로히 리히텐스타인등은 사회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 - 예를 들면 마릴린 먼로의 얼굴,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 -을 작품 속에 도입함으로써 기초 체계와 그들 자신의 테마를 겹쳐서 표현하고 있다.

9) 극사실주의 (HYPER REALISM)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경향의 회화와 조각을 일컫는다.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극히 생생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특징으로 한다.주관을 적극 배제하고 어디까지나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과 같이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는데 주로 의미없는 장소, 친구, 가족등이 대상으로 취급된다.
극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사실주의로, 특히 팝 아트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팝 아트처럼 평상의 생활 즉 우리의 눈앞에 늘 있는 진부한 이미지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팝 아트와는 달리 그것은 극히 억제된 것으로써 아무런 코멘트도 없이 다만 그 세계를 현상 그대로 다룰 뿐이다. 대표적인 작가로 척 클로즈, 하워드 캐노비츠, 맬컴 몰리, 필립 펄 스타인, 시드니 틸림등의 작가가 있다.

10)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포스트 모더니즘은 지난 20세기에 걸쳐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삶과 사고를 지배해온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기 모더니즘은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은 아니지만, 그 중심적 동기는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의 각 장르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건축 비평가들이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유행하던 엄격한 사각형 형태의 양식에 대한 반발로 나온 건축물에 대해 쓴 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이 분화되지 않은 과거의 예술을 소생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시대, 다른 문화로
부터 양식과 이미지를 차용하는 예술은 모두 '포스트 모던'의 자격을 얻는다.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또 다른 주된 특징은 모더니즘 문화와 사고 방식이 세워놓은 엄격한 지배의 틀을 거부하는데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소통이 불가능한 정치, 문화, 전문화의 영역을 깨뜨리고, 삶과 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술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끌여 들여 비판적으로 다룬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아직은 확정된 일관성 있는 체계는 아니며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욕망에 의해 촉발된 회의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이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의 폐허를 헤치고 나가며, 모더니즘의 부정이라는 가시적인 대안을 세우려 노력한다.

 

'그림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중세도시  (0) 2008.10.05
  (0) 2008.10.03
[스크랩] w  (0) 2008.04.15
사라진,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1000억원에 팔린 가세의 초상화)  (0) 2008.02.05
빈 센트 고흐, 우울한 날에 표상  (0) 2008.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