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글

덕유파스텔 2008. 2. 17. 21:54



          사랑하는 맏딸.


          네가 태어난 1983년 정월 초하루에도 아빠는 지금과 같이
          너의 곁에 있지를 못하고 건설현장의 최일선에 있었다.
          설날이었기 때문에, 설마 설날에 네가 태어나리라고는 꿈도
          못 꾸었던 아빠는, 마침 현장에 비상근무가 걸렸고
          설날 며칠 지나서 태어나겠지 하는 마음에, 고향으로 다 떠나고
          아무도 없는 그 추운 현장에 혼자 비상근무를 자처했었지.


          저녁 때 퇴근하니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더구나.
          허허~ 이 놈이 정월 초하루날 세상에 나왔구나.
          되면 아주 크게 잘 될 녀석이니까 잘 키우고,
          건강하고 튼튼한 녀석이니까 집걱정은 하지 말거라~


          너를 처음 보고, 아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어릴 때 상당하게 불우한 편이었던 아빠 인생에 그리 기뻤던
          일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볼 수 없을만큼 기뻤다.
          그 전에 아빠가 이 세상을 바라보았던 조금의 원망스러운
          마음이라던가 시무룩했던 마음들이, 단 하나, 너의 그 귀여운
          모습 하나에 그 모든 애꿎은 마음들이 눈녹듯이 다 소멸되더구나.


          아빠는 그 이후로, 아이를 낳아서 어른으로 키워간다는 그 일
          외에 더 이상 세상에 신비한 것은 없다고 보는 편이다.
          부담은 가지지 마라. 아빠는 무작정 너를 그리 믿는다.
          그리고 아빠는 그 때 생각했지. 애 생일은 양력으로 잘
          지내줘야겠구나. 안 그러면 우리 맏딸, 명절에 치어 생일상
          제대로 못 받는 건 명약관화한 일이니까.


          네가 커가면서 사소한 이런 저런 일들은 있었으나
          아빠는 궁극적으로 클 때는 다들 그렇게 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또 할아버지나 할머니 때문에 도중에 상당히 큰
          어려움과 난관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은 오롯하게 아빠가 싸 안을
          일이지, 외면하거나 버리거나 하지를 못하는 그런 일이었다.
          가족은 그렇게 논리적으로 형성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너는 아직도 그것을 온전하게 다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을 아빠는 가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월이 흘러 너도
          가족이란 걸 꾸려가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그런 일이기에, 내가
          나서서 미리 너에게 그 일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한다한들, 겪지 않은
          일을 네가 어찌 알 것이며, 때가 되면 모든 게 다 그렇게 이루어질
          것을, 아빠가 미리 걱정한다고 지금 될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덧 네가 사회라는 곳에 발을 디딜 나이가 되었구나.
          그냥 생각한 사회와 직접 겪는 사회는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아빠는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뻣뻣한 푸른 껍질의 수박 안에
          달디단 붉은 과육이 있듯이, 어쩌면 겉으로는 딱딱하고 차가운
          모순이 가득한 듯 보이지만, 그러나 그 저변으로는 항상 따뜻함이
          은은하게 깃든 그런 곳이라고 생각한다. 저 수박의 외.내형을
          사람이 뛰어넘을 수 있다면 모르되, 없다면 사람도 수박처럼 그래야만
          한다고 아빠는 생각한다.


          조금의 두려움이 있겠지만, 그것은 다른사람들이 다 하는 그러한
          일이니까 너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리고 실력이 꽉 찰
          그 때까지 참고 견뎌 나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될 거다. 사회에
          나를 알아달라고 결코 빌붙지 마라. 치열하게 살아서 그들이 너를
          꼭 필요로 하게 그렇게 만들어라. 세상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결국
          다 자기 하기 나름이지, 세상이 그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 알고 있겠지만, 이제 아빠의 남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너희
          셋이 이 세상을 너희 힘으로 사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닐 것이나, 나는 그러한
          너희들의 완벽한 성공을 내 눈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실패에 굴하지 않고 초심을 그대로 간직하여, 그것을 향해
          다시 또 얼마나 매진하는가 하는, 오로지 그러한 너희들의 삶에
          대한 자세가 얼마나 단단한지를 보고자 함이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고 실패하고는, 사람의 힘에 시간과 공간의
          조건이 그렇게 맞아 떨어져야 가능한 것이니, 참으로 힘든 것이다.
          그러니 기실 너희들이 최선을 다해 어떤 것에 대해 더 없는 성공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공 구비조건에 최대 1/3 이상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하였다 하더라도, 그 무엇을 탓할 궁극적인
          원인이나 계제는 사실 사람에게 없는 것이니, 오로지 사람은 사람의
          최선만 다할 일이지, 그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이 턱없이 짧은 인생, 과소비하는 것 외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렇게 사람의 계산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계산을 하지
          않는 가족이란 것이 필요한 것이다. 거친 세상 살면서, 그런
          가족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어떠한 사상,
          이념, 사유, 불변의 진리도 결국 가족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끝없이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사랑함으로써, 쉬이 다치기 쉬운
          인간을 치유하고, 무한하게 다독거리고 보듬어안음으로써, 사람이
          세상 사는 형태의 가장 진솔한 균형을 구조적으로 갖는 것이다.


          사랑하는 맏딸.


          아빠가 세상에 살아있을 날이 많아야 기껏 20년 정도가 남았구나.
          네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다도 몇 년 더 짧은 그런
          세월이지만, 어차피 인생은 산술적 계산이 아니라 질의 문제니까
          그리 짧은 세월은 아니리라. 한 톨의 후회없는 삶이란 없겠지만,
          그래도 후회보다 보람이 훨씬 더 많았던 게 아빠의 세월이었다.
          아빠가 태어나서 클 때보다 어쨌든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고,
          너희도 무난하게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며 잘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강한 사람이란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이해심
          넓은 사람이며, 때로는 서슴없이 아무 조건 달지 않고 제 것을
          세상에 내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한없이 깊은 마음 속에서 늘
          새로운 것을 창출하고, 차후에 따를 고통을 인지한 채 그대로 그걸
          과감하게 행위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아빠는 생각한다.
          편지를 손수 써서 부쳐야 하건만, 시간 없어 메일로 보내 미안하다.


          암울한 현실 앞에서도 늘 웃음과 해학을 간직한, 건강하고 넉넉한
          그런 마음으로 어두운 곳에서도 항상 밝음을 지향하는 아주 큰사람이
          되거라. 마음 비좁게 조그만 것에 휩쓸리거나 연연하지 말고, 멀리
          바라보고 깊게 생각한 다음 무겁게 행동하는, 그런 선량하고 은은한
          아름다움이 배인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 아빠가 뒤에서 늘 기원하마.


          사랑하는 맏딸.


          아무런 걱정하지 마라. 그 모든 것이 그리 되든, 또는 그리 되지를
          않든 그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이 달랑 한 평생만을 살고
          치우자고 한다면, 살면서 어렵게 궁구할 건 아무 것도 없다. 아빠는
          그렇게 살기엔 정말 너무 시시하고 한심했으며, 결정적으로 지금의
          너를 이 세상에서 처음 본 순간, 그것을 뛰어넘기로 했다. 그렇다.
          아빠는 이곳을 떠난 그 다음날도, 분명히 너를 사랑하고 있을 거다.      







          音 Charlie Haden & Pat Metheny 'Cinema Paradiso Love Th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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