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3월 23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부근 페리 역에서는 전명운, 장인환 두 애국 청년이 친일 망언을 일삼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적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해서 '참 기가 막힌' 그렇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 한가지 있다.
생명부지이던 두 청년의 운명을 함께 엮은 것은 1908년 3월 20일 일본 외무성과 한국통감부의 밀령을 띠고 샌프란시스코에 온 스티븐스였다. 이날 스티븐스는 여러 신문기자들을 모아 놓고 기자회견을 했고, 이튿날 '신프란시스코클로니클' 등지에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다." "한국 신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계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농민들은 일본 사람을 환영한다," 는 등 친일 망언이 크게 보도되었다.
스티븐스는 1884년 일본외무성 고문으로 채용된 뒤 일본의 침략외교를 담당했다. 1904년 8월 일본이 강제 체결한 '외국인고문에 관한 협정'에 따라 한국정부의 외부고문이 된 뒤 을사조약체결과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뒤 정미 7조약의 체결, 고종의 강제 퇴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서 당시 한국인에게는 '해충'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런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의 망언에 분개한 두 애국 청년은 1908년 3월 23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려고 페리 역에서 워싱턴 발 기차를 타려던 스티븐스를 향해 약속이나 한듯이 차례대로 총격을 가했다. 전명운이 먼저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 되었다. 뒤이어 장인환의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스티븐스를 명중시켰다. 이 일로 두 청년은 미국인 살인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두 청년을 '1급 살인죄로'로 내몰려고 정부 차원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최고의 미국인 변호사를 고용했다. 이에 맞서 미주 동포사회는 두 애국 청년을 살려내려고 공판투쟁 선금을 모아 미국인 변호사를 고용했다. 미주 본토와 하와이는 물론 멕시코와 멀리 국내, 연해주, 중국, 일본 등지의 동포사회도 성금모금에 응할 정도의 민족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공판투쟁에서 해결해야할 중요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공판에서 두애국 청년의 말을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는법정 통역자가 필요했다. 재판관은 물론이고 배심원에게 두 애국 청년의 우국충정과 한국의 실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문제는 재판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선택된 인물이 당시 하버드대학에 다니던 이승만이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급히 와 달라.' 는 급전을 받은 이승만은 '무슨 일인가?'하고 궁금해 하면 샌프란스스코로 왔다. 전후 사정을 들은 이승만의 '답변'. 아마 여러분은 당연히 'Yes'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 No' 였다. '기독교 (감리교) 신자인 자신은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랫동안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던 미국인 올리버가 '미국인보다 더한 미국인'이라고 이승만을 단적으로 평가 했듯이 이승만에게 두 애국 청년은 미국인 스티븐스를 살해한 살인자였을 뿐이었다. 결국 두 애국 청년의 공판 통역은 당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수학 중이던 신홍우가 대신했고, 공판 결과 전명운은 무죄 석방, 장인환은 살인죄로 25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가 10년을 복역한 뒤 가석방되었다.
'Yes' 가 아닌' No'라고 답한 이승만의 행동은, 이후 그가 '위임통치사건'과 함께 독립운동계에서 왜 독립정신과 애국심의 진실성을 의심받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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