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글

발해의 멸망과 거란의 흥망성쇠

덕유파스텔 2007. 12. 26. 13:54

 

1.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발해는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한 지 30년 후인 668년, 고구려의 옛 장수였던 대조영이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동모산을 근거로 세운 나라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발해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받을만큼 크게 번성했고, 그 국력 또한 강건했습니다. 구당서와 신당서 등의 사료들을 보면, 발해는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를 갖추었으며, 최전성기인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의 치세 무렵에는 서쪽의 요하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菟州)를 설치하였고, 동으로는 연해주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지금의 흑룡강을 넘어 천여 리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여, 그 지역의 강력한 토착 세력인 흑수말갈족을 복속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부여와 숙신과 예맥과 옥저와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확보한 것이죠.

 

그러나 이렇게 번영을 구가하던 발해는 926년 1월 15일, 거란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아 수도인 홀한성이 함락되고 15대 임금인 애왕 대인선이 포로로 잡혀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히 거란의 공격입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백두산의 폭발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그로 인해 거란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데 그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낭설입니다. '백두산 폭발설'의 배후는 거란의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심리가 숨어 있는 데, 사실 우리들은 '거란'하면 곧바로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을 떠올리고 형편없는 무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10세기에 이르러 대제국 요를 건설했으며 약 2세기 동안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군림한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러시아와 몽골에서는 중국을 키타이, 혹은 햐타드라 부르는 데 전부 '거란'이란 뜻입니다. 러시아와 몽골은 왜 아직까지 중국을 '거란'이라 부를까요? 그건 그만큼 거란의 국력과 이미지가 중국과 동일시될 만큼 강대했기 때문입니다.

 

거란이 망하고 난 지, 2백 년 후에 원나라에 온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는 그가 체류한 북중국을 '카타이'이라고 불렀는 데 이 역시 거란이란 뜻이죠. 오늘날에도 서양인들은 중국을 가리켜 '케세이'라고 부르는 데 이것도 거란의 원명인 키타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거란이 왜, 어떤 과정을 거쳐 발해를 멸망시켰는지 지금부터 연재 형식을 통해 다룰 것입니다. 

 

2. 발해의 혼란과 거란의 부흥.

 

거란은 기원전 3세기 무렵, 흉노의 영걸 모돈 선우에게 멸망당한 동호족의 후예로서 몽골계 유목민족입니다. 참고로 흉노에게 멸망한 동호족은 동쪽으로 도주해 셋으로 나눠지는 데, 첫째는 선비족이고 둘째는 오환족이며 셋째가 거란족입니다.

 

선비족(鮮卑族)은 서기 4세기 말, 북만주에서 중원으로 남하하여 북위(北魏)를 세워 150년 동안 북중국을 지배합니다. 지나친 한화 정책으로 부족민들의 반발을 사 멸망한 이후에도 수와 당의 지배층을 형성했을 만큼 오랫동안 중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세력이죠.

 

오환족(烏桓族)은 선비족과는 달리 강력한 제국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선비족은 중국과 먼 거리인 북만주에 터를 잡고 살았던 데 반해, 오환족은 중국과 가까운 곳에 살아서 그 동향이 중국에 금방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오환족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삼국지의 대표적인 영웅 중 하나인 조조(위의 시조)의 공격을 받아 서기 3세기 초에 멸망하고 맙니다. 조조에 정복된 오환족은 그 후, 중원으로 이주하여 오환돌기(突騎)라 불리는 뛰어난 기마부대를 이루어 위오촉 삼국 중 위를 최강국으로 이끄는 데 많은 공헌을 합니다.

 

그리고 거란족(契丹族)은 서기 4세기 무렵에 처음 등장하며, 지금의 요하 상류 방면인 시라무렌 강에서 거주했습니다. 거란의 원명인 키타이(khitai)는 '칼날'이란 뜻인 데, 살벌한 느낌의 이름과는 달리 거란은 오랫동안 약소국의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거란의 지리적인 요소 때문인데, 거란은 동으로는 고구려, 서로는 유연 및 돌궐 같은 몽골 방면의 유목민과 남으로는 북위와 수, 당 같은 중원 세력 사이에 낀 신세였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아니, 온통 힘센 놈들로 에워싸인 형국이니 영락없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동네북 신세였지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낀 외형적 요소 외에도 거란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흔히 유목민들의 군주를 칸(Khan)이라고 하시는 건, 잘 아실 겁니다. 거란도 몽골계 유목민이니 군주인 칸이 있는 데, 특이하게도 거란의 칸은 세습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거란족의 '칸'은 세습 종신제가 아닌 8개 부족의 대인(족장)들이 모여 선출하는 방식으로 옹립됩니다. 일단 칸으로 뽑히면 칸을 상징하는 깃발과 칸의 명령을 거란 전체의 뜻으로 받든다는 의미의 북을 전임 칸으로부터 넘겨 받습니다. 그러나 칸의 임기는 3년이며 임기가 끝나면 칸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자기 아들이나 동생 등의 가족에게 물려주는 세습은 절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칸은 부족민 사이에 벌어지는 분쟁과 소송을 잘 해결하는 사람이 선출되었습니다. 덧붙여, 거란칸의 자격은 무기와 모직, 의료 등의 기술에 정통한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군주가 3년마다 계속 바뀌니, 거란족은 일관성 있고 지속적인 국가 운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거란족을 이루고 있는 8개 부족들은 서로 자기 부족 출신으로 칸을 옹립하기 위해 파벌 싸움과 암투를 벌였으니, 자연히 국력을 하나로 집결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외부로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고, 내부적으로는 국가 통합이 안 된 상황에 봉착한 거란족은 자그마치 5백년 동안이나 주변 강국들에게 핍박받는 약소국의 처지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유연과 돌궐이 사라지고, 고구려가 멸망했어도 거란의 신세는 별로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고구려가 망한 뒤, 30년 동안 거란은 당나라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고 이를 참다 못해 697년, 당에 반기를 들기도 했으나 곧바로 당의 사주를 받은 동돌궐(동돌궐은 630년에 당의 장수 이정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고, 682년에 일태리쉬 칸의 인도로 다시 부흥합니다.) 묵철(카파간) 칸의 공격으로 치명타를 입습니다. 동돌궐의 공세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컸던 지, 거란은 이로부터 약 50년 동안이나 침체기에 빠집니다. 

 

그 후, 고구려의 후계자인 발해가 일어서고 몽골 초원에서는 돌궐을 대신하여 위구르가 들어섰습니다. 당의 국위는 여전히 강력하였고 이대로 세 방향이 모두 대국들로 틀어막힌 상태로 거란은 이대로 숨이 막혀 죽는 가 싶었는데... 전혀, 뜻밖의 사건이 벌어져 거란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변하게 됩니다.

 

서기 755년부터 763년 동안, 당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안사의 난이 터진 것입니다. 약 8년 간에 걸친 안사의 난은 위구르의 참전으로 간신히 진압되기는 했으나, 그 여파는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당의 각 지방은 군사권을 장악한 절도사들의 할거로 분열되었고 당의 국력은 쇠퇴 일로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거란에 가해지는 당의 압력도 예전보다 훨씬 약해졌지요.

 

거란을 둘러싼 행운은 계속되었는데, 몽골 초원의 패권을 장악한 위구르는 9세기 초에 동서 무역로 장악을 두고 멀리 티벳 지방의 토번과 벌인 대접전에서 예상 외로 참패를 당했고, 그 여파로 인해 서북 방면에 웅거하고 있던 키르키즈 족의 일격을 맞아 몰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위구르를 패망시킨 키르키즈 족은 몽골 초원 전체를 장악할 능력이 없어, 우왕좌왕하다 자신들의 본 거주지인 시베리아 방면으로 물러났습니다. 이로써 몽골 초원은 1206년, 칭기스칸이 출현할 때까지 약 350년 동안 절대 강자가 없는 힘의 공백지가 됩니다.

 

위구르와의 접전에서 승리한 토번은 842년, 다르마 위돔텐 왕이 10살의 나이로 재상 일당에게 살해되었고, 왕위를 둘러싼 분쟁으로 나라가 분열됩니다. 토번은 이 때부터 중앙 정부가 존재하지 않고 약 150년 동안 기록이 없는 암흑 시대로 들어갔습니다. 한 때, 당의 수도 장안을 함락시킬 정도로 강성했던 토번은 내분으로 인해 쇠약해져 버린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거란의 서쪽 방면과 남쪽 방면의 위협은 사라졌습니다. 거란 북쪽에 있는 유목민 집단인 해족(奚族: 선비계 유목민)과 실위족(室韋族: 몽골계 수렵민)은 통합되지 못한 약소한 집단이어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동쪽의 발해인데... 그러나 발해의 지배층들은 10대 선왕 이후, 물질적인 풍요와 향락에 젖어 외부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무거운 세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연이어 봉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발해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일단 백성들의 마음이 중앙 정부를 떠나자, 수많은 군인들도 백성들과 뜻을 같이하였고, 차츰 그 장군들도 부하들과 같이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또한, 귀족들 중에서는 이 틈을 이용하여 왕권을 노리는 자들이 나타나 농민들의 반란을 부채질하기도 하는 형국이었습니다.

 

농민들의 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고,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중앙 정부의 관리들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불붙은 농민들의 성난 민심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특히 신덕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동경용원부에서 일어난 반란은 대단히 거세어서 중앙의 도성 방위군까지 동원해서야 겨우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를 보면, 발해는 거란에 망하기 바로 1년 전인 925년에도 농민들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려는 발해 관군과의 사이에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발해마저 큰 혼란에 휩싸이고 있으니 거란은 마음놓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 와중인 서기 872년, 거란의 운명을 바꿔놓을 아이가 데라부의 야율족 집단 거주지인 야율밀이 마을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로, 훗날 거란족을 통일하여 대제국 요를 세우는 영웅입니다. 그리고 발해를 멸망시키는 장본인이기도 하지요.

 

3. 거란의 영웅,

  1) 야율아보기

 

야율아보기는 거란을 이루고 있는 8개 부족 중 가장 강력한 데라부 출신이었습니다. 이런 후광을 바탕으로 야율아보기는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워, 자신의 세력을 점차 길러 나갔습니다.

 

  서기 901년, 데라부 출신인 혼덕근이 8부 족장 회의에서 칸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칸이 된 혼덕근은 자기 부족 출신이자 명성이 자자하던 야율아보기를 거란 8개 부족의 군대를 모두 통솔하는 이리근(夷離菫: 군 총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이 때 야율아보기는 29세의 야심만만한 청년이었습니다.

 

  거란군의 총사령관이 된 야율아보기는 즉시 원정에 나서 주변 국가들의 정복에 나섰습니다. 거란 주변에 있던 실위와 해족 등이 그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해족을 공격할 때는 교활한 해족의 족장 사라거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901년 10월, 야율아보기가 오랜 원정에서 개선하자 거란인들은 그를 '아주사리'라고 높여 부르며 환대하였습니다. 야율아보기가 세운 전공을 감안하여 칸 혼덕근은 그를 대대열부 이리근(국방 장관)으로 승진시켰습니다.

 

  다음해인 902년, 야율아보기는 4만의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당나라의 하동 지방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습니다. 이 무렵 당은 황소의 난의 여파로 거의 국가로서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여서 거란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야율아보기의 지휘를 받는 거란군은 9개의 군(郡)을 함락시켰으며, 중국인 포로 9만 5천명을 생포하였고, 셀 수 없이 많은 가축떼를 손에 넣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때, 당의 노응군 절도사 유인공이 조파를 선봉장으로 내세우고 수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거란군에 맞섰습니다. 그러나 야율아보기는 도산(桃山)밑에서 매복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허겁지겁 진격해 오는 당군을 손쉽게 매복전으로 괴멸시켜 버렸습니다.

 

  903년, 막대한 전리품과 잇다른 대승리를 거두고 당당히 개선하는 야율아보기는 이제 모든 거란인들의 열렬한 추앙을 받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칸 혼덕근은 그를 우월(于越)의 직책에 앉혔습니다. 우월은 총군국사(總軍國事)로서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됩니다. 이제 야율아보기는 칸을 제외하고는 명실상부한 거란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우월이 된 야율아보기는 곧 거란 데라부와 해족을 통합하여 13현으로 나누고 경략의 청하를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데라부의 세력은 거란의 나머지 7개 부족보다 더욱 강력해졌으며, 야율아보기가 내심 꿈꾸던 영구 집권의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율아보기는 포로로 잡아온 중국인들을 동원하여 난하 유역에 한성(漢城)을 쌓게 하고 주변에서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점점 불어나는 거란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유목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식량 증산을 노린 구상이었습니다. 또한 한성의 부근에는 소금이 나오는 염지가 있었는데, 거란의 여러 부족들은 이 소금을 가지고 당이나 발해에 내다 팔아 경제적인 이득을 얻고 있었습니다. 바다와 거리가 먼 당의 하북 지방이나 발해의 서북부 주민들에게 소금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상품이었죠.

 

  (예전에 KBS1 TV에서 광개토대왕의 원정 길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는데, 그 때 제작진들이 찾아간 내몽골 지역에서 실제로 소금이 생산되는 습지가 나왔습니다. 또, 오늘날 몽골에서도 비록 바다는 없지만 국토 곳곳에서 암염(바위소금)을 체굴하는 광산이 많습니다.)

 

  이 소금의 가치를 주목한 야율아보기는 당나라에 파는 소금의 수송과 판매권을 독점하여 많은 경제적인 이득을 얻었습니다. 또한 소금뿐이 아닌 말과 가죽 등 다른 상품들을 판매하는 거란의 육상 무역로도 독점하여 거란 여러 부족들의 경제권마저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혼란을 피하여 거란 땅으로 넘어오는 한족들을 규합하여 그 중에서 한연휘, 한지고, 강묵기 같은 우수한 인재들을 발탁해 등용하였습니다. 나중에 이 세 사람은 거란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의 반열에 오릅니다.    

 

  904년, 어느새 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거란의 전통에 따라 군장 회의가 소집되었고, 새로운 칸을 뽑아야 했습니다. 이 때, 거란인들은 사실상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던 야율아보기가 칸에 선출될 것이라고 여겼으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전임자인 혼덕근을 강력히 추천하여 다시 칸으로 선출되게 하였습니다. 혼덕근은 다시 칸으로서 3년의 임기를 연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활한 야율아보기는 거란의 3년 선출제를 고의적으로 파괴하여 갔습니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훗날 자신이 칸이 되어 3년이 아닌, 종신토록 지배하는 절대 전제 군주가 되고자 함이었습니다.

 

  야율아보기의 눈부신 활약으로 거란의 세력이 날로 강대해지자, 이를 불안하게 보고 있던 발해의 애왕(그리고 마지막 국왕인) 대인선은 속국인 흑거자실위(黑車子室韋: 실위족의 한 일파)를 사주하여 거란의 변경을 침략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격분한 야율아보기는 직접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출천하여 일거에 흑거자실위를 짓밟아 버렸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거란의 힘에 대인선과 발해의 지배층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거란은 예전의 힘없던 초원의 떠돌이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다음해인 905년 11월, 자신감에 가득찬 야율아보기는 7만 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당의 운주를 단숨에 점령하였습니다. 거란에 맞서는 당의 저항은 미약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야율아보기가 계속 남진하여 밀고 내려갔다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있던 당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율아보기는 아직은 본격적으로 중원을 도모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운주를 지킬 수비 병력만 남겨두고 거란으로 귀환했습니다.

 

  요사에 따르면 야율아보기는 자신의 평생 숙원을 두 가지로 꼽았는 데, 하나는 서방(몽골 지역)의 유목민들을 모두 평정하여 복속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발해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거란이 중원으로 남하했을 때, 유사시 서방의 유목민들과 발해는 거란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위험을 자신의 생전에 제거한 연후에 중원을 정복하여, 거란을 대제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 야율아보기의 숙원이었습니다.

 

참고자료 :

<거란제국사 연구>,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4권>, <신단민사>, <요사>, <거란국지>, <대쥬신제국사 4권> 

 

출처: 다음까페 역사속의전쟁사 타메를랑

 

 

926년 발해 멸망

 

928(송나라에 보낸 국서기준)~985

거란 저항세력의 대표적으론 정안국이 있고, 이 나라는 거란에 저항하다가 결국 조공을 바치는 신

세가 됩니다.본래 정안국의 왕으로 추대된 것은 왕족인 대씨였는데, 송나라에 보내진 국서를 보

면 열만화(烈萬華)로 바뀌고, 나중의 국서를 보면 왕이 오소경(烏炤慶)의 뒤를 이은 오현명(烏玄明)

으로 나타납니다.송나라에 보낸 국서들을 보면, 오씨 정권의 정안국은 스스로 대흥(大興)이란 연호

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985년, 평소에 정안국이 눈에 거슬렸던 요나라는 결국 이 나라를

멸망시킵니다.

 

1929~1930 : 발해 멸망 103년(정안국 멸망 25년)

요의 고구려계 관료였던 대연림(大延琳)이 요양을 중심으로 흥요국(興遼國)을 건국, 고려에 사신

을 보내 협조를 요청합니다.흥요국은 요양일대의 발해유민들의 매우 큰 호응을 얻었지만, 각지에서

온 거란의 군사들이 요양성으로 집결하게 되면서 세력이 약해집니다. 고려는 압록강 동변을 치지만

거란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고려의 지원을 받지 못한채, 부하 양상세가 거란과 내통하여, 요양성의

성문이 열리고, 결국 흥요국은 1년만에 멸망합니다.

 

1115년 : 발해멸망 189년(흥요국 멸망 85년)

요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가 여진족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시작하면서, 거란의 통치에 가장 온순했

던 민족이었던 여진족들은 거란에 대대적인 항쟁을 시작합니다.여진의 본격적인 저항이 시작되면

서, 발해유민인 고욕(古欲)이란 인물이 '대왕'을 자칭하여 거사를 일으켰습니다.고욕의 반군

에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거란군은 결국에는 고욕을 포로로 잡게되는데, 반기를 든지 5개월만에 고

욕이 처단당한 것으로 사태는 종결됩니다.

 

1116년 : 발해멸망 190년(흥요국 멸망 86년)

요의 요양발해인 관료출신이었던 고영창(高永昌)은 요의 동경유수인 소보선이 발해인을 지나치게

탄압하자, 발해유민들과 봉기하여 소보선을 처단합니다.동경성을 완전히 장악한 고영창은 스스로

'대발해황제(大渤海皇帝)'를 칭하고, 국호를 대원(大元), 연호를 '융기(隆基)'라고 정했습니

다.거병 10일만에 요동 50주를 휩쓸어버릴 정도로 포스가 막강했는데, 고영창은 고려와 연합을 모

색하지 않았으며, 제호(帝號)만은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여진족의 거두-아골타(금나라 태조)의 부탁

을 거절하였고, 결국 아골타와 세력다툼에 밀려서 5개월만에 여진족에 멸망당합니다.

 

고영창의 봉기가 가장 현실적으로 성공률도 높았는데, 고영창은 거란의 일족인 해족을 지나치게 탄

압했고, 고려와의 접촉을 시도도 않했으며, 여진족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였습니다. 이 때, 고영창이 저 실책을 하지 않고, 3년 이상만 버티다가 고

려에 통합되었다면, 우리민족은 요동 만은 되찿을 수 있었는데....

 

저항운동만이 아니라도, 발해인 중에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고관을 지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요사'나 '금사'를 보면, '요양발해인'으로 등장하는 고급관료도 꽤 되고, 고구려계~발해계의 성

(姓)을 쓰는 사람도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