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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걸중상, 걸사비우, 이진충, 이해고, 설인귀…. TV드라마 ‘대조영’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익숙해진 이름들이다. 고구려의 멸망과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등장하는 이 인물들은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에서 펼쳐진, 파란만장한 역사의 주역들이었다. 이들의 이름이 우리 귀에 익숙해진 것만큼이나 발해를 한민족사의 중요 구성요소로 받아들이는 일반인들의 인식도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말갈족의 나라였다고 강변하고 있다. 고구려를 승계한, 한민족의 국가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발간한 ‘발해의 역사와 문화’(사진)는 이같은 중국측 주장을 총체적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발해사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는 책은,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諡號)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황상(皇上)으로 칭하는 ‘황제국’이었음을 밝혔다. 한마디로, 발해가 자주적 왕조였음을 학술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위원 등 22명의 관련 분야 전문가를 비롯, 중국·일본·러시아의 학자까지 참여한 책은 발해의 각종 제도 및 외교관계, 사회,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책의 주요 논지를 소개한다.
◆ 발해는 자주적 왕조국가였다 = 동아시아의 당시 질서가 당나라 중심이었지만, 이같은 국제적 질서가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발해 왕에 대한 당나라의 ‘책봉’은 주변 왕조에 대한 외교적 승인 행위 이외의 다른 의미는 아니다.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사용했음을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新)당서’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신당서는 이같은 발해의 움직임에 대해 ‘사사로이’ 한 것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하는 한편 발해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는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일본에서 스스로를 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는 ‘고려국’이었음을 자칭했다.
◆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했다 = 발해가 국제 교류에서 고구려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기록에 의하면 서기 739년 발해 사신 이진몽(已珍夢) 일행이 일본에 당도, 이듬해 정월 조회에 참석했는데 발해 사신과 함께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통역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학생으로 발해 사신의 통역을 담당하기 위해 배석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는 발해 사신과 신라학어의 언어가 서로 소통 가능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서, 발해 사신이 신라어와 통하는 고구려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발해의 국제교역로 = 발해가 ‘일본도(道)’ ‘신라도’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음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임석규 조계종 연구원은 발해의 토기와 자기가 고구려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규명했고, 전현실 박사는 발해의 주거문화가 고구려의 온돌 형식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혔다.
< 김영번 기자>
발해의 개국공신들에 대해 현실적으로 발해에 대해 남겨진 정확한 사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누가 발해의 개국공신인지 정확하게 가려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발해가 698년에 건국하여 대조영의 아들 무왕의 사망까지 포함 약 40년의 시차가 생기는데, 무왕대에 활동했던 인물들 가운데 상당한 알리바이가 생기는 인물들은 존재합니다. 그들을 토대로 어느 정도 알리바이가 가능한 인물들을 골라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카페에서 [신문덕]이란 사람을 발해의 개국공신에 올려놓는데... (오연명과 이복연이란 사람은 잘 모르겠습니다. 허구인듯 합니다.)이 사람은 물리적으로 도저히 발해의 개국공신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당나라로 사신으로 파견되는 인물이며, 그 기록에 남은 인물이지만 그는 780년대 이후에나 당에 사신으로 파견됩니다. 만약 그가 700년에 태어났어도, 80세 이후에나 사신으로 파견됐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억측에 가깝고... 따라서 그는 발해의 개국공신이 아니라 발해 문왕 말년에 당나라로 사신으로 파견됐던 사신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1. 727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4인방 "고인의, 고제덕, 사나루, 덕주"
- 이들은 당시의 나이 40대~50대라고 치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발해의 개국공신 반열에는 올려놓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50세라고 가정하면, 677년 쯤에 태어난 것이 되고 698년에 발해가 건국했으니 개국공신의 반열에는 적어도 올려놓을 수는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다만 40대나, 30대로 치면 고왕 중말기의 인물들로 모두 발해 무왕의 핵심참모들입니다. 이들은 일본으로 이때 사신으로 갔으나, 착하이에서 해적들의 습격을 받아 사신단으로 갔던 16명 중 8명이 살해당합니다. 나머지는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발해로 돌아옵니다.
2. 무왕대에 당나라로 사신으로 갔었던 인물(725년~726년 등장)
- 마문궤, 총물아: 이 사람들은 무왕의 호위무장으로, 대문예의 반란을 진압하고 당에 파견되어 대문예를 송환하려고 했던 첫 사신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당나라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무력시위만 하다가 당나라의 이도수와 원복의 사기극으로 결국 돌아오게 되는 인물입니다. 726년 당시 이들의 나이를 40~50대라고 치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발해의 개국공신 반열에는 올려놓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무리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 하조경, 이진언, 공백계: 이들은 하조경과 공백계가 무장출신이고, 이진언은 문인출신입니다. 이들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하조경은 대취진, 대낭아(대호방?)과 함께 당에 조공사신(722~724년)으로 갔으며, 공백계는 737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고, 이진언은 대문예를 송환받고, 무왕의 국서를 전달하기 위해 갔습니다. 이들은 다소의 억측을 가미하면, 그나마 알리바이는 생길 듯 싶습니다.
3. 말갈계 인물들
- 무왕대에 말갈부락들이 발해의 지배권에 들어오면서, 이들이 사신으로도 많이 갔습니다. 대부분은 중요한 문제라기 보단 교역 내지는 조공을 위해서 갔던 인물들 같습니다. 이들은 율기계, 어부수계, 오나달리, 매취리, 목지몽, 다몽고와 같은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걸사비우의 사후, 그들의 후예나 아니면 무왕의 정복사업으로 무왕의 밑으로 들어온 사람들 같은데... 무왕의 이러한 정복사업이 725년 이전에 마쳐졌으므로, 다소의 억측을 가미하면 고왕대에도 충분히 활동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일부는 걸사비우와 함께했던 인물들로 설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대야발, 대일하, 장문휴, 임아상, 고연무
- 이들은 가장 알려진 인물들입니다. 물론 임아상은 제 2차 고당전쟁 때 전사(사망?)한 행군총관 임아상과 이름이 같지만, 사실 동명이인도 적지 않죠. 임아상은 무왕의 장인으로 알려졌습니다. 임아상이나 장문휴, 대야발, 대일하는 물리적으로는 개국공신 반열에는 올려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연무는 고구려부흥운동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650년 쯤에 태어났다고 치고, 왕족출신으로 태대형으로서 670년대에 부흥운동을 일으켰다면... 다소의 억측을 부리면 개국공신의 반열에는 올릴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5. 위서논란이 있는 사람들...
- 대진국본기에는 나오는 "연충린"과 최근에 기와의 와당으로 발견된 "섭리계"란 사람... 이 사람들은 실존여부가 불분명하고, 섭리계란 사람도 무왕 당대에 활동한 인물이라고 보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고... 이들에 관해선 보다 확실한 검증이 필요해 보입니다.
6. 왕실의 인물들...
-대취진(무왕의 이복동생), 대호방(무왕의 이복동생), 대낭아(무왕의 이복동생), 대의신(무왕의 아들, 대흠무의 형), 대도리행(무왕의 장남), 대문예(무왕의 동생, 무왕을 배신하고 당에 투항)
7. 덤으로...
무왕의 탄생연도는?
글쎄요. 정확한 답은 없습니다. 다만,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705년 당나라로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부분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문예가 사신으로 파견가서, 어느 정도의 활동력있는(외교력이나 첩보능력) 활동을 하기 위해선 약 20세라고 치고.... 그러면 그는 685년 경에 태어난 것이 됩니다. 무왕 대무예는 대문예보단 나이가 많을 것이므로, 685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대문예를 최소한 685년 생이라고 한다면, 대무예는 2~3살 터울 정도로 봤을 때 680년~682년 정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일부는 그가 719년 임금에 오를때 불혹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느 정도 정황이 있어 보입니다.
또한 무왕의 다음 후계자인 대흠무(문왕)는 무왕의 장남이 아닙니다... 무왕의 진짜 장남은 727년 당나라 땅에서 대문예를 척살하려다가 실패하고 객사한 대도리행입니다. 이런 위험한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면, 그가 20세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너무 어린 나이의 왕자에게 그런 일 시키지도 않겠죠...) 약 705년~707년에 태어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왕이 680년~682년 경에 태어났다고 보는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대흠무에겐 바로 윗형인 대의신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흠무의 나이만 가지고, 무왕의 실제나이를 추적하는 것은 오류일 듯 합니다.
그렇다면, 대조영의 나이는 대조영 드라마에서처럼 645년 생인가? 대무예가 대조영의 장남이란 사실에는 변동이 적어도 없을 것 같습니다... 추측하기 쉽도록 하자면... 연남생이 634년생, 그의 아들 연헌성이 659년생. 그러면 약 25세가 평균적으로 자녀를 생산하는 나이라 본다면, 대략 680년 초반 생인 대무예의 아버지 대조영은 655년 경에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합리적인 시각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645년 생이라고 한 것이 사기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경우 74세의 수명이었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경우도 67세의 수명이었으며, 후백제의 견훤도 70세 이상의 수명을 살았기 때문에... 대부분 나라를 건국하는 군주들은 절제되고, 철저한 생활로 수명이 길었습니다. 군주로 철저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면 평균수명 그 이상의 장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대부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왕건과 견훤이 870년대~940년대를 살았던 인물이고, 고구려 패망기와 고작 200여년 차이임을 감안할 때 의료수준이 초특급으로 발전했다고는 보기가 힘듭니다...
아무튼, 비교적 실존인물들을 바탕으로 서술하여 보았습니다. 이 부분은 보다 더 확증된 검증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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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에 거란족 출신의 당나라 장수 이해고의 군대가 패배를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중상과 대조영 부자가 이끄는 고구려 유민 집단은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 집단과 함께 영주지방에서 거란족 가한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주나라의 착취에 대한 반발로 일으킨 반란이 일어나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을 이끌고 패망한 고구려 지역인 요동으로 탈출을 하게되고!
측천무후는 고구려 유민집단의 우두머리인 대중상에게는 진국공 이라는 직위를, 말갈족 추장인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 이라는 직위를 내려서 회유하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 거란족 출신의 당나라 장수인 이해고로 하여금 영주를 탈출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추격하게 하고.
걸사비우는 이해고의 당군과의 전투에서 전사를 하고, 대중상은 이해고의 군대의 추격을 피하는 과정에서 병이 들어서 죽게되고 대조영이 아버지 대중상의 직위를 이어 받고 걸사비우의 말갈족 까지 이끌게 된 후에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군과 말갈족들과 함께 천문령에서 이해고의 당군을 기습공격으로 전멸을 시키는 데!
과연 대조영이 발해건국에 중요한 분수령이 된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의 당군을 무찌를 수가 있어던 원인은 무엇일까요? 측천무후가 이해고로 하여금 20만의 당군으로 하여금 대조영 집단을 추격하게 한 것을 보면 당군과 함께 고구려 원정에 참여를 해서 요동지역의 지리와 사정에 밝은 인물 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대조영이 날쌔고 용맹하며, 용병에 능한 인물로 나오고 있습니다. 대조영과 이해고의 어떤 차이가 대조영을 승자로 이해고를 패자로 만들었을까요?
발해의 주민구성에서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족으로 보는 시각이 정당하다고 볼 수가 있는지 의문 입니다.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대다수의 고구려 유민과 소수의 말갈족으로 보는 시각이 올바르지 않을까요?
고구려는 700년 이상 오랜 세월 동안 요동지역을 지배한 북방의 패자 라고 할 수가 있는 대제국인 나라 입니다. 멸망을 한 668년의 이후 발해가 세워지기 까지 30년 동안의 공백기간 동안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로 가기도 하고 당으로 끌려 가기도 하고 했으며, 바다를 건너서 일본으로 거거나 아니면 돌궐 지역으로 흩어지기도 했을 겁니다.
요동지역은 당의 세력이 원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넓은지역이고 대동강이남의 고구려 영토를 차지한 신라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 입니다. 그리고 30년 이라는 그 공백기간은 고구려 유민들이 오랜 전쟁으로 감소한 인구를 원상태로 회복을 하고도 남을 수가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또한 고구려에 오랜시간 복속이 된 말갈족이 고구려 멸망이후에 자신의 나라를 세울려는 움직임도 없어습니다. '말갈' 이라는 종족명 자체가 어떤 특정한 종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주변 변방지역에 살아가는 사람을 '말갈' 이라고 부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당나라에서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 임을 인정하기 싫어서 발해를 발해말갈 이라고 부른 것이나 속말말갈을 속말수, 즉 송화강 지역에서 살아가는 고구려인을 백산말갈은 백두산에서 살아가는 고구려인, 흑수말갈은 흑룡강 일대에 살아가는 고구려 인 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설사 말갈족이 존재를 했다고 해도 소수에 불과하고 고구려인으로 동화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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