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고구려는 왜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는가?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최치원이 당나라의 태사시중(太史侍中)이라는 벼슬아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 백제가 전성했을 때 강병 백만이 남쪽으로 오나라 월나라(상해등지)를 침략하고 북쪽으로 유주, 연나라(북경쪽), 제나라(산둥반도), 노나라(산동반도)를 쥐고 흔들어 중국의 큰 적이 되었소이다. 수양제가 망한 것은 요동(=고구리)을 정벌하려다 그것 때문에 망했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도, 백만 대군을 동원할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1. 고구려는 왜 백제와 신라에 대한 완전정벌을 하지 않았는가?
즉, 집안의 원수만 갚으면 됐지, 굳이 멸망시킬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던 같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은 백제 아신왕이 항복을 하고 영원히 고구려의 노복으로 남을 것을 맹세한 것으로 모든 것을 관용으로 받아 들여 적어도 독립 왕국으로서의 실체를 인정해 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한반도 남해안으로 보내서 전라남도와 경남지역의 토착세력인 왜를 토벌해서 완전히 한반도로부터 멸망시켜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백제의 존재를 놔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은 백제를 멸망시킬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백제가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꾀하고 있다는 정세판단에 따른 것 같다. 하지만,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죽었으며, 비록 공주로 천도를 해서 계속 국왕이 존재했지만 고구려에 항복하고 속지가 되었기에 백제는 독립된 국가가 아닌 일종의 자치왕국정도로 여기게 되었고, 신라 또한 광개토왕때 그 신민이 되기로 맹세하여 사실상 고구려가 관리와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속지로 관리한 까닭에 대고구려 제국의 영토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봤을 때 신라는 당시 상당히 미개한 나라였다.
실제 신라는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들 때는, 신라의 기술로는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백제인을 불러서 겨우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건축기술 뿐만 아니라 여러 문명적으로 매우 뒤떨어져 있었기에 고구려의 지배를 받으면서 비로서 주변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개화를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나 중원 고구려비엔 이러한 고구려에 대한 백제와 신라의 복속관계가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삼국통일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백제와 신라(당시 가야에도 고구려의 관리가 파견되어 내정을 간섭하고,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가 고구려의 속국이 됨으로써 삼국통일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서기 6세기 중반 성왕과 진흥왕이 협력해 고구려를 침범하자 고구려에선 이를 지방세력의 반란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도 이에 따른 근거였다.
2.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 중원고구려비문 내용
중원고구려비는 1981년 3월 18일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03cm,폭 55cm이며 1979년 4월 5일 조사되어 알려졌다. 발견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 모두에 글을 새긴 4면비이며,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되고 있는데,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광개토대왕비의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빌의 발견이라는 점과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1)금석문(金石文)이 남아있는 것은 광개토대왕비 등 그 수가 적기 때문에 이곳 중원지방에 완전한 돌비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다. 글씨나 글에 고구려인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비가 만들어진 연대는 423년 장수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
3. 중원고구려비 비문과 비문풀이
중원고구려비는 총높이 203㎝, 비면높이 144㎝, 너비 55㎝로 1979년 4월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의 조사에 의해 학계에 보고되었다.
고구려 광개토왕비를 축소한 듯한 모양의 4면비(四面碑)이로, 화강암의 표면에 3~5㎝의 크기로 글자를 새겼고, 글자체는 예서(隸書)에 가까운 해서(楷書)이다.
이 비석 앞면의 글자는 거의 마모되었는데 마을 아낙네들이 빨래판으로 오래 이용했기 때문이다. 판독할 수 있는 글자가 비교적 많은 앞면의 경우 10행에 각 해당 글자수는 23자이다. 그리고 좌측 면은 7행에 각 행마다 23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우측 면과 뒷면은 그 마모가 너무 심하여 최근에야 글자의 흔적을 확인할 수 가 있었지만 추정하길 총글자수는 400여자 산정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단편적이지만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국제관계, 영역문제를 비롯해 고구려인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전면
1 - 五月中高麗太王祖王令□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2 -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太使者多于桓
3 - 奴主簿貴德佃類□安聰□去□□到至궤官天太子共□
4 - 向望上共看節賜太곽鄒敎食在東夷寐錦之衣服建立處
5 - 用者賜之隨□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服敎東
6 -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
7 - 大位諸位上下依服來受敎궤官之十甘二月三日甲寅東
8 -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太使者多于桓奴主簿貴
9 -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
10 - □疏奴□□凶□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踐動□□
좌면
1 - □□□忠□□于伐城不□□村舍□□□□□□沙□□
2 - □□□□□□□□刺功□□射□□□□□節人刺□□
3 - □□□□□□辛酉□□□□□□□□□□太王國土□
4 - □人□□□□□□□□□□黃□□□□□□□安□□
5 - □□□□□□□□□上右□辛酉□□□□東夷寐錦土
6 - □□□□□□方단故□沙□斯色□太古鄒加共軍至于
7 - □□去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우면
1 - □□□□□□□□□前部大兄□□□□□□□□□□
2 - □□□□□□□□□□□□部□□□泊□□□□□□
3 - □□□□□□□□□容□□□□□□□□□□□□□
4 - □□□□□□□□□□□□□□□□□□□□□□□
5 - □守自□□□□□□□□□□□□□□□□□□□□
6 - □□□□□□□□□□□□□□□□□□□□□□□
<비문풀이>
전면 1행을 보면, 5월 중에 고구려 대왕이 상왕공(相王公)과 함께 신라의 마립간과 만나 영원토록 우호를 맺기 위해 중원에 왔으나, 신 마립간이 오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고구려 대왕은 관노부 대사자 다우환노를 이 곳에 머물게 하여 신라 왕을 만나게 하였다.
…12월 23일에 신라 왕이 신하와 함께 고구려 대사자 다우환노를 만나, 이 곳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사자 금노(錦奴)로 하여금 신라 국내의 여러 사람을 내지로 옮기게 하였다.- 여기서의 內地란 고구려가 개척한 중국내의 영토를 이르는 말인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기록들에 고구려가 신라인들을 자신들의 새로운 정복지로 이주 시켰다는 내용이 나오기때문이다.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
또한 전면 2행과 3행에 걸처, 태자(太子) 공(共), 전부 태사자(前部 太使者) 다우환노, 주박(主簿), 귀덕(貴德) 등의 관직과 이름이 보인다. 신라왕 매금을 불러 의복을 하사하는 구절이 있는데(전4), 이는 앞의 문장 "如兄如弟(전1)"와 더불어, 고구려가 신라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뜻으로 풀이된다.
고구려에서는 신라를 동이(東夷-전4)로 부르는데, 이로써 고구려가 스스로 천하의 중심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고구려의 군사지휘관이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었던 사실도 비문 속의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전9)라는 구절을 통해 확인된다.
4. 중원고구려비를 통한 역사적 사실
중원고구려비는 당시 한반도내에서 고구려 장수왕의 업적을 잘 기록하고 있다. 5세기장수왕 때 고구려가 중원지역(오늘날 충주)까지 진출하여 남한강 유역을 장악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장수왕은 평양천도를 단행하였다. 이것은 국내적으로 국내성에 기반을 둔 귀족 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왕권 강화를 의도한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기 위한 남진 정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진정책 결과 고구려는 충주까지 진출하고 충주지역에 남진기지로 국원성을 건립하였다. 이 지역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중앙탑을 만들고 중원경을 설치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처럼 삼국이 충주지역을 중시한 이유는 충주 지역이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6세기 후반 고구려의 온달장군은 평원왕에게 "계림현과 죽령의 서쪽지대를 우리 땅으로 돌려오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출정하였는데 이 지역이 충주지역을 말한다. 충주는 육로와 수로를 갖춘 전략적 요충지였다. 즉 한강으로 이어져 한성으로 가는 길목임과 동시에 죽령과 계림현을 통해 경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충주는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던 셈이다. 이러한 교통의 요지외에도 충주지역은 철생산지였다. 철갑기병에 기반을 둔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충주지역 확보는 군사력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기도 하다.
(2) 고구려와 신라의 정치적 관계
특히 이 비석에서 관심을 끄는 대목은 고구려와 신라와의 정치적 관계이다. 중원고구려비와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신라왕을 공히 매금(寐錦:신라에서 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이전에 해당하는 용어, 대수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마립간 칭호와 유사)이라 하고 있다.
즉 이것은 당시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받치는 관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비문에는 '사상하복'(賜上下服)이라는 글도 있다. 고구려왕이 신라왕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의복을 주었다라는 뜻인데 의복을 주고 받는 관계는 정치적 상하관계를 의미한다. 비문에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글이 있다. 이것은 신라 영토내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또한 신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 그릇은 광개토대왕에게 제사를 받치는 그릇이다.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보아 당시 신라는 고구려에 복속관계에 있는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이 비석에는 당시 고구려인들이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그들 왕을 태왕(太王)이라 칭했다는 사실과 하부(下部)·수사(守事)·주부(主簿) 등등의 고구려 관직이 언급되어 있다.
(얻어 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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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고구려에게는 삼국통일을 왜 하지 않았을까!
먼저 고구려의 기본적인 목적은 자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천하를 이루는 데에 있었기에 굳이 남정에 힘을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또한, 신라의 경우 조공정도가 아니라 아예 속국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전락했다.
광개토태왕이 5만의 군사로 신라 구원 명목의 남정을 한 후에 신라의 수도에는 고구려군이 주둔했을 정도 이다. 굳이 무리를 해서 멸망 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니면 고구려는 그런식으로 신라를 고구려와 엮은 다음
신라인들이 고구려화 되면 쉽게 흡수할 생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백제는 고구려로서도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장수왕에게 백제의 개로왕이 참수당하기까지 했지만
백제역시 근초고왕시절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때에도 백제가 고구려와 전력충돌을 해서 멸망까지 이르게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듯이
고구려로서도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이기까지 했지만 남쪽의 충청도, 전라북도 지역에는 백제의 세력이 왕성하게 남아 있었다.
광개토태왕릉비에 백제를 백잔이라는 멸칭으로 표현하며
백제에 대한 승리를 아주 자랑스럽게 적어놓은 것은 단순히 지난날의 원한때문이었다기 보다는
그만큼 백제가 쉽지 않은 상대였으며,
릉비의 표현처럼 압승만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는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고구려의 적은 남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와 누대에 거쳐 원한을 맺어온 연나라도 있었다.
물론 전성기에 이르러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듭 승리하며,
멸망시키고, 고구려와 비슷한 종족의 국가인 북연이 들어서도록 하지만 그 북연도 장수왕때와서 북위와의 전쟁으로 멸망하여 고구려는 중국의 북조국가인 북위와 완충세력 없이 마주대하게 되었다.
당시 동북아는 유목제국인 유연과 중국의 북조, 남조가 수직으로 맞대고 있었고 고구려는 동쪽으로 조금 빠져서 그들과 별도로 한 축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만약 고구려가 통일을 한답시고 국력을 남쪽에만 기울였다면 그 균형이 무너져서 고구려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
남쪽이 중요한 땅이기는 했지만 이미 고구려에게 숙이고 있는데 균형파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쪽을 정복할 필요는 없는법. 남쪽에는 백제, 신라 외에도 마한이 아직 남아있었고,
가야역시 존재했다.(마한은 근초고왕때 병합된 것이 아니라 무령왕때까지 존재했음이 고고학 발굴에 의해 밝혀졌다.)
백제에게는 왜라는 가까운 세력도 있었다.
결국 고구려는 남쪽을 공격해서 통일을 할 이유도 없었고, 실제로 그러기엔 국력도 조금 부족했다.
그런즉,
바로 고구려 장수태왕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7일간의 공방끝에 함락시켜 백제 개로왕을 참수한 사실이 있다.
이는 고구려가 마음만 먹으면 백제는 멸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원고구려비를 보면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였고, 신라왕이 고구려왕의 노객이 된다는 내용이 있다.
즉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백제의 항복을 받고,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으니, 고구려로서는 무리하게 통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거의 통일에 가까운 것이었다.
게다가 동북아 정세에 대해서도 고구려가 불리한 입장에 처했다고 풍기는 뉘앙스는 어처구니가 없다.
이미 고구려는 4강 중 하나였으며(고구려,북위,남조,유연) 거란을 선동하여 북위를 공략하고,
유연과 남조와 연계하여 북위를 압박할 정도로 강국이었다.
오죽하면 북위가 고구려 왕이 죽었다고 친히 상복을 입고 애도를 취할까?
이는 당시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윗 글 처럼 식민사관의 늪에서 우리 역사를 바라보면 우리 역사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일 수 밖에 없다. 적극적, 능동적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