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의 화가들 중에서 특히 같은 인상주의 화가인 쇠라의 작품을 올려볼께요!!
고흐가 자유로운 붓 터치로 그림을 그렸다면, 쇠라는 매우 과학적인 접근과 점묘법을 통해서 병치혼합의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래 참고하세요!! (그림과 설명이 있습니다)
쇠라 (프랑스 화가) [Seurat, Georges]
출처: 브리태니커
1859. 12. 2 프랑스 파리~1891. 3. 29 파리.
19세기 프랑스의 신인상주의를 이끈 화가.
대비색을 작은 색점들로 병치하여 빛의 움직임을 묘사한 그의 기법을
점묘법이라고 한다. 그는 이 기법을 사용하여 대작들을 남겼는데, 질서정연하게 찍혀진 순수색의 작은 점들은 너무 작아서 작품을 감상할 때 거의 식별되지 않으며, 단지 화면 전체가 빛으로 아른거리는 효과를 자아낸다.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Une Baignade, Asnières〉(1883~84)·〈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1884~86)가 있다.
쇠라는 원래 샹파뉴 출신의 지주인 44세의 아버지 앙투안 크리소스톰 쇠라와 파리 태생의 어머니 에르네스틴 패브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도시의 관리였던 아버지는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로, 르 랭시에 그가 소유하고 있던 정원 딸린 작은 별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어린시절 쇠라는 주로 파리에서 어머니와 남동생 에밀 및 여동생 마리 베르트와 함께 살았다. 1871년 파리가 프랑스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고 독자적인 혁명 정부를 세웠던 파리 코뮨 당시 장래를 염려한 그의 가족은 한동안 퐁텐블로에 내려가 살았다.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875년부터는 조각가인 쥐스탱 르키앙에게 교육을 받았다. 1878년 파리의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인
레만의 반에 들어갔다. 레만은 주로 초상화와 틀에 박힌 누드화를 그렸다. 학교 도서관에서 쇠라는 이후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책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제네바 태생의 화가 겸 판화가인 욍베르 드
쉬페르빌이 쓴
〈절대적인 미술 기호들에 관한 평론 Essai sur les signes inconditionnels de l'art〉(1827)이었다. 그것은 미학의 장래 방향 및 선과 이미지의 관계를 다룬 책이었다. 그는 또한 수학과 음악을 결합시킨 제네바의 미학자 다비드
쉬테르의 작품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짧은 활동 기간 내내 쇠라는 미술의 지적이고 과학적인 기초에 매우 강한 관심을 보였다.
20세 되던 1879년 11월에 군복무를 하기 위하여 브레스트로 간 쇠라는 그곳에서 바다와 해변, 배들을 그렸고, 그 다음해 가을에 파리로 돌아와서 레만의 반(班)에서 만난 에드몽 프랑수아
아망 장과 함께 작업실을 차렸다. 쇠라와 아망 장은 국립미술학교의 노선과는 달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장 바티스트 밀레의 정감어린 풍경화를 보고 감탄했다. 친구가 된 이 두 사람은 저녁에 종종 함께 댄스 홀과 카바레에` 들렀으며, 봄에는 여객선을 타고 그랑드자트 섬에 가곤 했는데, 이 섬은 후에 쇠라의 그림의 배경이 되었다. 쇠라는 1883년에 처음으로 살롱에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어머니의 초상화와 친구인 아망 장의 초상화를 전시했으며, 같은 해에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의 습작과 스케치 및 패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84년 이 그림이 살롱의 심사원들에게 거절되자 쇠라는 '심사원도 없고 상도 없는' 단체인 '독립미술가협회'의 창설위원으로 가담했고 그해 6월에는 이 협회 전시인
앙데팡당전에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를 출품했다. 이 시기에 그는
퓌비 드 샤반의 웅장하고 상징적인 그림들을 보고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100세나 된 화학자 미쉘 외젠 셰브뢸을 만나 빛의 색채 범위에 관한 그의 이론을 실험하여 3원색인 빨강·노랑·파랑과 그것들의 보색들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연구했다. 그무렵 뒤에 그의 주요한 제자가 된 폴
시냐크를 만났으며, 또한 그의 걸작인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위한 작은 습작들을 수없이 그렸다. 1884년 12월에는 현대 미술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앵데팡당전에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를 다시 출품했다.
1885년 그랑드자트 섬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겨울을 보낸 뒤 그해 여름은 노르망디의 그랑캉에서 지냈다. 이무렵 시냐크의 소개로, 한때 점묘화법을 구사했던 인상파의 대가 카미유
피사로를 만났으며, 1886년 5월 15일부터 6월 15일까지 열린 인상파 전시회에 완성된 대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전시했다. 그의 기법을 뚜렷이 보여주는 이 그림은 당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에 쇠라의 주요한 미술 동료는 그와 마찬가지로 색에 미치는 빛의 영향에 관심이 있었던 시냐크와 피사로였다. 벨기에의 시인인 에밀 베르아렌은 독특한 쇠라의 작품과 그의 기발한 착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미술비평가인 펠릭스 페네옹은 한 진보적인 평론지에서 쇠라의 양식을 격찬했다. 또 저명한 화상인 뒤랑 뤼엘은 파리와 뉴욕에서 쇠라의 작품을 전시했다. 1887년 잠시 다락방 작업실에서 살면서 쇠라는
〈모델들 Les Poseuses〉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같은 대작으로서는 마지막 작품인데, 그는 〈클리시 광장 Place Clichy〉도 같은 규모로 그릴까 하다가 그 생각을 포기했다. 다음해 그는 〈모델들〉·〈퍼레이드 La Parade〉를 완성했다. 1888년 2월 그는 독립미술가들의 작은 그룹인 '뱅'의 전람회를 구경하기 위하여 시냐크와 함께 브뤼셀에 갔는데, 그 전람회에 그는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비롯해 7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쇠라는 1889년의 독립미술가전에 참가하여 풍경화들을 전시했으며, 이무렵 시냐크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당시 그는 피갈 지구에서 21세의 연인 마들렌 크노블로흐와 함께 살았다. 1890년 2월 16일 마들렌이 아들을 낳았으며, 쇠라는 그 아들을 공식으로 인정하여 출생기록부에 피에르 조르주 쇠라라는 이름으로 입적시켰다. 그해에 쇠라는 〈캉캉 춤 Le Chahut〉을 완성하여 브뤼셀에서 열린 '뱅'의 전람회에 보냈다. 그무렵 그는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연인과의 밀애를 계속 숨긴 채 그녀의 초상화인 〈분을 바르는 젊은 여자 Jeune Femme se poudrant〉를 그렸다. T케르크 근처의 그라블린에서 그해 여름을 보내면서 여러 점의 풍경화를 그리고 그의 마지막 그림이 된
〈서커스 Le Cirque〉를 계획했다.
쇠라는 마치 그의 죽음이 곧 닥칠 것이라고 예감하기라도 한 듯 제8회 앵데팡당 전시회에 아직 완성하지 않은 〈서커스〉를 전시했다. 그는 전람회 준비위원으로 작품들을 전시하고 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던 중, 감기에 걸린 것이 전염성 편도선염으로 악화되어 전람회가 끝나기도 전인 1891년의 부활절 일요일에 죽었다. 그 다음날 마들렌 크노블로흐가 그녀가 사는 구역의 읍사무소에 나타나 자신이 피에르 조르주 쇠라의 어머니임을 밝혔다. 아버지의 병에 전염되었던 그 아이는 1891년 4월 13일에 죽었다. 쇠라는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의 지하납골소에 묻혔다. 쇠라는 7점의 대작들 외에 40점의 작은 그림과 스케치, 500여 점의 소묘 및 여러 권의 스케치북을 남겼다. 작품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것들은 그가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한 시기의 주요한 화가였음을 보여준다.
신인상주의-조르쥬 쇠라
http://cafe.daum.net/philrand

The Eiffel Tower,
1889, oil on canvas,
The Fine Arts Museum of San Francisco.
조르쥬 쇠라가 그림그리는 방법은 매우 특이하다. 쇠라는 사물의 이미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그결과 모든 사물이 점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쇠라는 다른 화가와 달리 붓으로 그리는 대신 점을 찍어서 그림을 완성했다.
아래 그림 완성하는데 2년이 걸렸다고 하니 그 끈질긴 인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점을 찍어 그리는 방법을 점묘법이라고 하는데 당시 후기인상파 화가들은 이런방법의 그림을 매우 싫어했던것 같다. 쇠라가 인상파에 속하기는 하나 이러한 이유로해서 신인상주의라고 구분해서 불리운다. 아래 자료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것 같다.

조르쥬 쇠라의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이그림은 신인상주의의 대표인 조르쥬 쇠라의 작품인데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런 기법을 인상화화가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나이 31살에 요절하는 바람에 신인상파는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인상파는 모네가 [인상, 일출]이란 그림을 전시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한바 있다. 피사로를 비롯하여 마네,세잔,드가,르누아르, 여류 커새트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인상파가 찰나성이나 流動하는 느낌 등 빛의 정서적 측면을 강조했다면, 신인상파의 창시자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1859~1871)는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그래서 전자를 "낭만적" 인상주의, 후자를 "과학적" 인상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빛에 대한 관심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낭만적" 인상주의와 "과학적" 인상주의 사이에는 분명 연속성이 있지만, 낭만적 추구와 과힉적 추구 사이에는 그 현격한 시각 차이에 따른 단절이 존재할수 밖에 없다. 쇠라는 특히 삼원색과 색채 대비, 보색에 관해 심혈을 기울여 공부했고,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적용해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미술계 안팍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같은 열성적인 탐구 끝에 나온 그의 독특한 조형법에 점묘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쇠라는 과학자처럼 집요하게 빛과 색의 성질을 탐구함으로써 매우 개성적인 조형세계를 열게 됐고, 마침내 현대미술의 중요한 선구자 가운데 사람이 되었다.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는 쇠라가 점묘법을 이용해 그린 대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은 어느 일요일의 한가한 오후, 그랑드 자트섬에서 여가를 즐기는 파리 시민들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그림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산책을 하거나 풀밭에 앉아서 쉬는 모습을 차분하게 담고 있다. 한가롭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안개가 낀 듯 다소 뿌연 느낌이 없지 않지만, 색조가 무척 신선한 인상을 주고 그림의 표면 역시 상당히 매끄럽게 느껴진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과 다른 점이있다면 인상파의 빛과 그림자는 찰나의 인상을 주는 반면, 쇠라의 빛과 그림자는영속적이고 영구적인 느낌을준다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의 한순간이 장중하고 영구적인 기념비로 남은 듯하다.

쇠라의 [아니에르에서의 목욕]
쇠라의 그림이 주는 이런 독특한 인상은 찰나가 과학적 관찰의 대상이 되면서 영원으로 고정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화면 위로 붓을 휘두르지 않고 작은 점을 고르게 찍어 표현하는 점묘법을 사용했다.
병치혼합이라고 불리는 이 "시각적 마술"이 화면에 독특한 안정감과 기념비성을 더해준다. 이처럼 견고한 그림이 원숙한 노대가가 아니라 불과 서른한살의 나이로 죽은 젊은 예술가에 의해 탄생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는 젊음의 에너지를 격렬하게 분출하기보다 이처럼 냉철하고 이지적인 시선으로 사물이 질서를 깔끔하게 드러내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러나 빛을 그린 그림인데도 점묘법에 뿌리를 둔 그의 그림이 1886년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되자 몇몇 인상파화가들은 이 모임에서 탈퇴해버렸다.
그의 빛과 그림자가 기왕의 인상파의 빛과 그림자와는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빛이 그처럼 고정적이고 영속적인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을 참아 넘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