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e Rodin
1840.11.12 ∼ 1917.11.17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공증인이자 지주였던 세르 피에르의 서자로 앰폴리 근처의 빈치에 있는부친의 가족 소유지에서 1452년에 태어났다. 15세 때 그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도제가 되어 그의 공방에서 회화와 조각 및 여러가지 회화 기법등 다방면의 훈련을 받았고, 이웃해 있던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의 공방에서도 일하면서 처음을 해부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뛰어난 회화적 기량은 베로키오가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와 <수태고지>에 그가 그린 천사와 풍경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며 그의 초기작 <카네이션을 든 성모>,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에서도 나타난다.
1482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대공의 후원을 받게 되어 피렌체를 떠난다. 레오나르도는 1499년 루도비코가 권좌에서 물러날때까지 17년간 밀라노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대공의 전속 화가이자 토목기사로 지내면서 화가이자 조각가로 또 궁정 연회의 기획자로 활동했다. 그는 밀라노에서 지낸 17년간 단지 6점의 작품만 남겼는데 <암굴의 성모>,<최후의 만찬>,<악사>등이 이에 속한다. 1490-95년 레오나르도의 거대한 집필계획은 시작되었다. 거기에는 그의 필생의 중요한 4가지 주제가 포함되었는데, 회화에 관한 논문. 건축에 관한 논문. 기계학의 원리에 관한 글. 인체 해부에 관한 개요가 그것이다. 그밖에도 지구물리학. 수리학. 기상학에 관한 연구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그가 어렴풋이 생각해낸 '눈에 보이는 우주론'의 일부를 이룬다. 그는 관념적인 지식을 경멸하고, 체험에서 직접 보고 터득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을 받아 들여 기록했다. 이렇게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의 2가지 활동영역이었던 예술과 과학은 훗날 그의 창조력을 발전, 구체적으로 실현시켰다.그것은 서로의 영역을 고무시키고 또 자극하는 일종의'창조적 이원론'이였다.
1499년 12월즈음 레오나르도는 루카스 파치올리와 함께 밀라노를 떠났다. 처음엔 만토바에 머물렀고 베네치아를 거쳐 피렌체에 머물렀다.1502년 여름 그가 피렌체를 떠나 '군사 건축 및 기술 전반 고문'으로 체사로 보르자를 위해 일하기로 한 것은 그의 무한한'삶에 대한 욕구'로 볼 수 있다. 그는 체사레보다 2배나 나이가 많았지만 그의 개성에 끌렸을 것이다. 그 밑에서 일하는 동안 레오나르도는 현대 지도작성법의 기초를 닦은 도시 계획도와 <지형도>를 남겼다.
1503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베키오궁에서 거대한 벽화를 그리는 엄청난 주문을 받았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이무렵 <모나리자>와 <레다>도 그려는데, <레다>는 미완성인 체 모작들만 남아 있다. 피렌체에 머문 이 시기는 집중적인 과학연구의 시기이기도 했다.그는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에서 인체를 해부했으며,그 실험을 신체기관의 구조,기능에 대한 폭넓은 연구로 발전시켰다.또한 새들의 비행을 조직적으로 관찰했고, '물의 성질과 움직임'에 대한 그의 수리학적인 연구는 물의 물리적인 특성.특히 기류법칙과 비교 연구한 수류법칙에 관한 연구로 확장되기까지 했다.
그는 1507-8년의 겨울을 피렌체에서 지낸 것 외에는 밀라노에서 6년간 머물렀다.그의 일이란 고작 건축일에 관한 조언이었고 밀라노에서는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다만 피렌체에서 가져온 <성모자와 성안나> 와 <레다>를 계속 그렸을 뿐이다. 그리고 주변에 다시 제자들을 불러들였는데,옛 제자인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와 함께 <암굴의 성모> 2번째 판을 그렸다.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예술 방면의 일에 비해 그의 과학 활동은 꽃을 피웠다.해부학 연구는 파비아 출신의 유명한 해부학자 마르칸토니오와 함께 협력하여 새로운 차원을 이룩했다. 그는 인체와 그 기관의 정확하고 상세한 도해뿐 아니라 비교해부학과 생리학 전반에 걸친 작업 계획을 세웠다.
1513년 프랑스인들이 밀라노에서 축출되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60세가 된 레오나르도는 또 이사를 해야 했다. 로마로 간 그는 공방에서 수학을 연구하다가 기술적인 실험을 하고 도시를 거닐며 고대 건물들을 살펴보곤 하는 등 낙담해서 나날을 보냈다. 그는 브라만테와 사귄 듯 하나 그는 1514년에 죽었고,다른 예술가들과는 사귄 것 같지 않다. 그런 고독함 때문에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왕의 초청을 받아들여 프랑스로 갔던 것 같다. 1516년말 그는 가장 충실한 제자인 프란체스코와 함께 이탈리아를 영원히 떠났다. 그는 생의 마지막 3년간을 루아르 강변의 앙부아즈에 있는 왕의 여름 궁전 근처 클루의 작은 집에서 보냈다. 그는 '왕의 수석 화가.건축가.기술자'라는 자랑스런 칭호를 부여받았다. 이무렵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고 불가사의하며 신비스런 <세례 요한>을 그린 것이 전부이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과학 연구를 분류하고 편집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며, <세상의 종말>이나 <대홍수> 같은 소묘에서 소멸하지 않는 그의 천재성을 입증해준다.
1529년 5월 2일 레오나르도는 클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생플로라탱이라는 궁정교회에 안치 되었으나 19세기초 그 교회가 완전히 철거되어 그의 무덤 또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작품과 과학적 유산은 프란체스코 멜치가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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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 |
11월 12일 파리에서 오귀스트 로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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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 |
그림을 그리기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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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 |
프티트 에콜(현 고등 장식미술학교)에 입학, 르콕 드 보아보드랑과 화가 벨록에게 수업을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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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 |
조각에 매력을 느끼고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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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 |
프티트 에콜을 마치고 에콜 데 보자르에 지원하나 입학시험에 세번 낙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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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 |
누이 마리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성령회 수사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1863년까지 머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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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 |
카리에-벨뢰즈와 공동으로 일하기 시작. 당시 20세였던 로즈 뵈레를 만남. 카미유 클로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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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 |
아들 오귀스트-외젠느 뵈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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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 |
반 라스부르를 따라 브뤼셀에 감.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국립방위대의 소위로 지원했으나 근시 때문에 제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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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 |
제대 후 벨기에의 카리에 벨뢰즈와 합류함. 모친사망. 이해 말 로즈가 브뤼셀의 로댕 곁으로 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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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 |
파리로 돌아간 카리에 벨뢰즈와 작업을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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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 |
벨기에 조각가인 안톤-조셉 반 라스부르와 공동작업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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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 |
벨기에에 있는 동안 브뤼셀 아카데미 궁전의 장식 일을 함. 스와네 숲을 그린 일련의 풍경화를 제작하고 풍자잡지 프티 코미크를 위해 석판화를 만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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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 |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미켈란젤로를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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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 |
브뤼셀의 "미술가·문인 동호회"와 파리의 "프랑스 미술가 살롱"에 <청동시대> 전시. <청동시대>는 모델에서 직접 주물을 떴다고 비난받음. 가을에 프랑스 중부의 성당 답사여행. 로즈와 함께 벨기에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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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 |
세브르 도자기 공장에서 1882년 12월까지 일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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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
첫 작업실인 위니베르시테가 182번지 대리석 보관소의 작업실로 이사, 죽을 때까지 유지. 프랑스 정부는 <청동시대>를 매입, 로댕에게 장식미술관을 위한 <지옥의 문> 위촉. 로댕은 말년까지 <지옥의 문> 작업을 계속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그의 사망 후 청동주물이 제작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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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
프랑스 정부가 <성 세례 요한>을 매입. 첫 영국방문. 런던의 알퐁스 르그로에게 판화기법을 배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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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 |
<아담>, <이브>, <생각하는 사람>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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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 |
당시 19세였던 카미유 클로델을 만남. 부친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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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
칼레 시위원회에서 에스타쉬 생 피에르를 추모하는 기념상 위촉, 이 작품 <칼레의 시민>은 1895년 로댕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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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 |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베냐민 비쿠나 멕켄나와 파트리치오 린치 장군 기념상을 위촉받음. <입맞춤>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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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
레종 도뇌르 훈장 수여. 갈리마르가 소유한 보들레르의 <악의 꽃>삽화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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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
프랑스 정부는 1889년 만국박람회에 출품용으로 <입맞춤> 대리석 제작을 위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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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
"국립미술협회" 창립에 가담. 1892년 낭시에서 제막된 클로드 로렝 기념상의 제작을 위촉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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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
위고가 서 있는 자세의 새 계획을 세우는 동안 정원에 설치하도록 첫번째 계획안 제작을 주문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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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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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
달루의 뒤를 이어 국립미술협회의 부회장직과 조각분과 회장직을 맡음. 부르델이 조수로 작업실에 합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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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
11월 28일 모네의 초대를 받아 기베르니에서 세잔을 만남. 1900년에 개막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르미엔토 기념상을 위촉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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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
1893년부터 임대했던 뫼동의 빌라 데 브리앙을 구입하고 골동품과 회화를 수집. 칼레에서 <칼레의 시민> 제막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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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
"로댕, 퓌비 드 샤반느, 카리에르"전이 제노바의 라트 미술관에서 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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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
예술애호가 모리스 페나이가 로댕의 드로잉 142점을 모아 출판. 옥타브 미르보의 서문이 있는 이 책은 출판사의 이름을 따 구필 문고로 이름지음. 국립미술협회 전시에 빅토르 위고 기념상 출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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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
당시 34세의 카미유 클로델과 결별, 문인협회는 국립미술협회의 전시에 출품된 석고 발자크상을 거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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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
퓌비 드 샤반느 기념상 위촉받음. 브뤼셀,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헤이그에서 로댕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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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벨기에의 레오폴드 국왕이 로댕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 만국 박람회의 알마 광장에 로댕관 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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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
만국박람회의 로댕관을 해체, 뫼동의 빌라 데 브리앙터로 옮겨 스튜디오로 개조. 외젠느 드루에가 촬영한 로댕의 주요작품이 "현대미술가 화랑"에 전시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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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
프라하에서 로댕전시. 로댕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를 만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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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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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
쉬아쥘 공작부인과 만남. 그들의 친분은 1912년까지 지속됨. 런던에서 최초로 대형 <생각하는 사람> 석고상이 "국제 화가·조각가·판화가 협회"에서 전시, 이어서 파리의 살롱전에 청동상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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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
"미술최고위원회"의 회원이 됨. 예나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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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음. 생각하는 사람이 판테옹 앞에 설치됨. 베를린 미술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 됨. 마르세이유의 박람회에서 공연한 캄보디아 무용수를 그린 일련의 수채화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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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
로댕의 모델이 된 일본인 무용수 하나코(1868-1945)를 만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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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
옥스포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음. 로댕의 드로잉만을 다룬 첫번째 대규모 전시가 파리 베른하임 죈느 화랑에서 열림. 대형의 <걷는 남자>상을 국립미술협회 전시에 출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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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성당> 제작. 릴케의 도움으로 로댕은 후에 로댕 미술관이 되는 비롱관의 작업실을 염. 비엔나와 라이프치히, 파리에서 대규모 로댕 드로잉전이 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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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
비롱관 매각결정. 파리의 드밤베즈 화랑에서 대규모 드로잉전이 열림. 폴 에스커디에의 주선으로 프랑스 정부에 작품기증 초안을 잡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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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레지옹 도뇌르 대훈장 수여. 파리 축제의 질 브라실에서 드로잉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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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
베를린 미술 아카데미에서 왕실전시. 프랑스 정부가 판테옹에 놓일 퓌비 드 샤반느 흉상 위촉. 영국 정부는 웨스트민스터 가든에 건립할 <칼레의 시민>모작을 구입. <걷는 인간>가 로마의 파르네제궁에 설치됨. 파리의 베르나르 그라세가 폴 그젤작 "예술에 대한 좌담"을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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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도쿄에서 로댕 전시. 리용의 신도서관에서 로댕의 드로잉 전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로댕관 개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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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
정신병원에서 카미유 클로델 매장. 파리 "의학협회"에서 로댕 소유의 골동품 전시. 로댕은 국회의사당 앞 <칼레의 시민>건립을 감독하기 위해 런던으로 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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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
오귀스트 클로의 모사화 100점과 샤를르 모리스의 서문이 실린 <프랑스의 대성당>을 아르망 콜렝이 출판. 로댕은 전쟁을 피해 로즈와 함께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감. 쥬디스 클라델이 동행. 로댕은 육군장성들과 로마에 머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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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
교황 베네딕트 15세의 흉상 제작을 하면서 로마여행. <칼레의 시민>이 축하행사 없이 영국에서 공식 개막됨. 영국정부에 기증한 18점의 작품 중 16점이 에딘버러의 스코틀랜드 국립 아카데미에서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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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로댕 병세 악화. 4월과 9월 13일, 10월 25일 세 차례에 걸쳐 작품을 정부에 기증. 하원에 이어서 상원이 기증을 받아들이고, 국회는 비롱관 자리에 로댕 미술관 건립을 결의. 로댕은 베르덩의 병사들을 추모하는 기념상 위촉을 받아들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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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1월 29일 뫼동에서 로즈 뵈레와 결혼. 로즈는 2월 14일에 사망, 이어 11월 17일에는 로댕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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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8월 4일 로댕 미술관 일반 공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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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명작 '칼레의 시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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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프랑스 칼레 시의회가 이 도시의 영웅 위스타슈드 생피에르를 기념하는 공공 건축물 제작을 1884년 공모했을 때, 로댕이 커미션을 따내 만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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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의 작품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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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낳은 천재 조각가 로댕의 감동적인 예술세계가 서울 한복 판에 되살아납니다. 조선일보사와 삼성생명, 문화방송은 공동으로 로댕갤러리(서울 태평로 삼성플라자 1층) 개관 기념 전시회 '사랑과 열정의 서사시-로댕 과 지옥의 문'을 마련합니다. 삼성생명이 94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매입한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을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입니다.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전통조각의 미적 규범과 틀을 극복, 조각예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현대조각의 선구자로 미술사에서는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조각가로 평가받는 거장입니다. 프랑스의 국보급 문화재인 '지옥의 문'은 인간 조건의 비극적 상황들을 격렬한 운동 감으로 표현, 일대 장관을 연출하는 초대형 브론즈(청동) 작품으로,너무나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과 '입맞춤' 등의 원형이 담긴 대작입니 다. 서울에 온 '지옥의 문'은 프랑스 미국 일본 스위스 등에 이어, 전 세계에서 7번째 오리지널 에디션을 보유한 작품입니다. 프랑스 칼레시의 공공 기념 조각상 '칼레의 시민'(12번째 오리지널 에디션) 역시 각 인물들의 움직임에 담겨진 인간 내면의 감정들을 절묘하게 표현한 로 댕의 대표작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로댕미술관 소장품 75점을 비롯해 삼성문화재단 소 장품 10여점 등 로댕의 다채로운 진품 명작을 선보이게 될 '로댕갤러 리'는 야외조각 전시장을 방불케하는 자연채광과 독특한 건축 디자인으로 서울 도심지의 문화명소가 될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고통, 격정과 사랑이 아로새겨진 '로댕과 지옥의 문'전에 미술애호가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관람을 바랍니다. |
삼성생명이 '지옥의 문'과 함께 구입, 영구전시하고 있는 '칼레의 시민' 역시 세계적 명작. 한국에 온 작품은 12번째로 제작된, 마지막 오리지널 에디션 진품이다.